2017년 부활절.

저 먼 땅, 예수라는 이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 지 벌써 거의 2000년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부활을 기념하며 여전히 모인다.

하필 4월 16일이기 때문이었다. ‘가나안 성도’를 자처하지만 교회의 문턱을 두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1년에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 광야에 있다지만 그래도 명절은 기념해야 하지 않는가.

복음서를 읽으며 ‘믿음’과 ‘부활’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예수는 ‘부활의 믿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원의 믿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믿음이 있다며 칭찬받았던 이들은 그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과 같은 이들이었다. 대관절 믿음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믿음의 태도’가 문제 아닐까? 어쩌면 믿음의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지 모른다. 무엇을 믿느냐 보다 믿음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은 고백이라기 보다는 삶의 태도와 형식이 아닐지.

‘병이 낳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라는 말을 들은 여인은 부활의 소문을 어떻게 들었을까. 그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무엇이었을까? 몸의 부활이란, 또 다시 사는 삶이란 어쩌면 처절한 고통에 내던져진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부활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인간의 노래’가 마음을 울렸다.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나는 부르리 자유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이 노래가 깊이 울림을 주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기 보다는, 어쩌면 부활이란 ‘다시 삶’이 아닐지.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이 지옥의 나라를 살아내는 삶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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