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생 Z씨 #2

2000년 ~ 2002년

‘한스트’는 뜨거운 경험이었다. 온누리 교회에서 경험한 그 아름다운 광경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더욱 감동스러웠던 것은 똑같은 티셔츠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거대한 소속감이 그를 휘감았다. 선배들은 친절했고, 교수들도 아름다웠다. 역시 백미는 세족식이었다. 낮은 자리에서 신입생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 그는 생각했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새파란 하늘과 붉은 건물의 대조가 낯설지 않아질 무렵, 동아리를 신청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사실 동아리 따위야 없어도 되는 것이지만 그 시절 무엇하나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동아리를 찾아보았다. 여러 동아리 가운데 그의 눈을 끌었던 것은 CFR, China Field Research!! 덕분에 2000년, 눈이 부리부리한 M교수와 함께 그해 여름 처음으로 이국땅을 밟았다.

비록 IMF를 자초한 까닭에 임기말 지지율은 바닥을 기었지만 임기초 김영삼 정부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이름의 이 정권은 이전의 낡은 세력을 없애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와 함께 외친 것이 바로 ‘세계화’였다. 이제 이 좁은 땅에서 벗어나 세계로 뻗어나가자! 해외선교, 아웃리치는 그런 면에서 세계화를 교회가 해석해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한다는 정신은 어느 시대건 기업가의 훌륭한 개척정신과 맞닿기 쉬웠다. 직업을 가진 자비량 선교 등이 주목받았던 것도 그 때문일테다.

해외 여행이 활성화 된 것도 그즈음이 아닌가 싶다. 나라는 어렵고, 대기업은 푹푹 쓰러졌지만 그렇다고 개개인의 삶마저 하루 아침에 다 엉망이 되지는 않았다. 높아진 소비 욕구는 해외로 눈길을 돌렸고, 그 흐름에서 교회의 청년들은 아웃리치를 통해 해외를 경험하곤 했다. 한편 90년대 이르러 한국은 이전과 같은 경제 성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더딘 성장율을 해결하기 위해 나라밖으로 눈을 돌렸다. 전도 대신 선교를!

여기에 1997년 불어닥친 위기감은 불에 기름을 더하는 식이었다. 20세기말 먼 이국 땅 조선을 찾았던 선교사들 처럼 그 역시 곧 주님의 나라가 오리라는 설레임에 과감히 이국 땅으로 발을 옮겼다. 미지의 땅이지만 그곳은 기도의 용사가 밟으면 언제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이었다. 땅밟기 기도는 기독교의 영토화를 위한 척후병의 몫이었다.

학교의 첫 학번, 95학번은 늘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앞서 황량한 땅을 개척한 정신이었으며 덕분에 늘 들려줄 다양한 무용담을 지니고 있었다. 성서에서는 맞이는 하나님의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였을까? 하나님은 모교 첫 입학생 가운데 둘을 데리고 갔다. 첫 순교자의 이야기는 지상명령을 수행할 젊은 영혼이 기억해야 하는 역사였다.

95학번은 십자군병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지역민들이 한동대를 지역의 대학교로 만들려고 할 때 앞장서 막았다. 노조가 학교를 뒤흔들 때에도 그들은 스크럼을 짜고 총장실을 수호했다. 한동대도 영적전쟁의 장소였다. 그들의 무용담에 귀를 기울일 무렵, 총장이 구속되었다. 죄목 가운데는 교비 전용이 있었다. 목자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에 학내는 들끓었다.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01년 5월 15일, 거의 전교생이 커다란 버스 수십 대를 나누어 타고는 교도소로 향했다. 경주 교도소 앞에서 재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총장 석방을 외쳤다. 신문에는 1500명 이라 하지만 족히 2000명은 넘었을 거였다. 아니, 몇 명이면 어떠랴. 총장은 한동대 그 자체였다.

Z씨 역시 카네이션을 들고 교도소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참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스승의 은혜도 부르고,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하는 이른바 학교 로고송도 불렀다. 그는 총장을 좋아했다. ‘여러분 아이러뷰’하는 그의 부드러운 웃음도 좋았고, 가끔은 식당이나 도서관에 나타나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주는 것도 보기 좋았다. 비록 직접 대면지는 못했어도 총장님은 늘 훌륭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무고하게 교도소에 있다니!

” 한동대학교 총학생회는 현재 법정 구속을 당한 김영길 총장님과 오성연 부총장님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냅니다.”

총학생회가 발표한 성명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런데 이에 딴지 거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내 인트라넷에 출몰하며 다양한 논란을 낳았다. ‘횡설수설’이라는 게시판은 그들의 전쟁터였다. 그가운데 N은 누구나 아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그가 수요일 채플시간일 때 채플 계단 앞에서 상복을 입고는 학교가 죽었다며 절을 해댔다. Z씨도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교수와 실랑이를 벌였지만 그는 꾸역꾸역 절을 해댔다. 문득 Z씨는 저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체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소문에 의하면 천막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찾아가는 학생들이 있다던데 그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질문이 들었다. 노조의 붉은 조끼와, 붉은 머리띠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약자를 편드는 건 좋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에 그저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었다.

2학년이 되어 전공을 선택했다. <낮은 울타리>에 감동했던 Z씨는 별 갈등없이 전공을 선택했다. ‘언론정보문화학부’! 아웃리치를 함께 떠났던 눈이 부리부리한 M 교수가 있는, 국제어문학부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처음 먹었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2학년이 되어 듣는 전공 수업은 기대와 달랐다. ‘문화 선교’에 관한 것을 배우는가 싶었는데 이래저래 그와는 좀 주소가 다른 과목들이 많았다. ‘구약 성서의 이해’인가 하는 과목이 있었는데 악명이 자자했다. 레포트를 많이 내야 하는 것은 물론 불친절한 R교수의 소문까지. 수업에 들어온 R교수는 자기를 교수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자기는 선생이라며. 그러고보니 선배들은 모두 ‘R선생님’이라 부르고 있더라. 이 호칭은 마치 타 학부생과 우리를 가르는 암호문 같은 것이었다.

공부는 힘들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선교에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성서 자체를 배운다는 게 큰 재미였다. 그 수업 중에 <욥기>에 대한 강의는 그에게 떼어낼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주었다. 공의의 하나님이 있는데 왜 의로운 자가 고통을 받는가. 질문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허리띠를 매고 질문에 답하라는 그 목소리처럼 어느 하나 대답하기 쉽지 않았다. 자꾸 말문이 막혔다. 쉽게 할 수 있는 말들이 점점 줄어 들었다.

2002년 대한민국에 길이 남을 해에 그는 한국에 있지 못했다. 모든 국민이 열광했던 월드컵 4강 ‘신화’를 써낸 그날 그는 중국에 있었다. 사람들이 뜨거운 밤을 보낼 때 그는 몇몇과 길거리에서 양고기를 뜯으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배워보겠다는 목적으로, 그리고 직접 선교현장에 뛰어들어보겠다며 중국 먼 변방을 찾은 것이다. 그해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미군 장갑차 사건도 있었고, 그리고 노무현의 노란 물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Z씨에게는 별 세계였다.

여름방학, 아웃리치 학생을 데리고 온 M교수와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M교수는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Z씨는 아웃리치 팀을 맞는 현장 보조의 역할이었는데 그간 중국에서 이른바 Y선생이라 불리는 선교사와 깊은 관계를 맺은 탓이었다. 딱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학교 밖의 세계는 좁은 학교와는 달랐다.

흥미롭게도 학교 내내 뜨겁게 달아올랐던 신앙이 이제는 불길을 잃어버렸다. 저 서북쪽 황량한 모래 바람이 그의 영혼을 덮은 걸까?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는 구약 성서를 읽으며 만났던, 욥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쉬운 답은 답이 아니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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