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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과 위안의 철학?!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가족끼리 손을 잡고 나들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하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내가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 힘은 수많은 철학서적을 읽고, 사색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바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다. 논리와 논증을 중시하는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은 깨달음을 중시한다. … (중략) …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중국철학사를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하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를 돌아보며 마음의 중심을 잡아갔다. 그때 책을 통해 깨달은 것들은 나를 새롭게 만든 자양분이 되었고, 나의 내면의 세계와 현실의 삶을 이끈 불빛의 역할을 했다. 오랜 세월 묻혀 두었던 동양정신의 유산을 빛나는 보석으로 닦아내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가는 가르침을 주는 펑유란 선생의 ‘중국철학사’, 일독을 권하고 싶다.”

어느날 서점을 방문했다 깜짝 놀랐다. 서점의 매대에서 만날 수 없는 책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펑유란(馮友蘭, 1894~1990)의 <중국철학사>!! 전공자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펼쳐보고는 이내 덮어버렸을 그런 책이 매대의 중앙을 차지한 모습이 어찌나 낯설던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어느 대학가 작은 서점에서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한 것이었다. 워낙 안 팔리니 떨이로 내놓은 것.
설명을 덧붙이면, 비록 읽기는 매우 힘든 책이나 명저로 꼽힐만한 책이다. <중국철학사>라는 당당한 저 제목을 보라. 마흔에 논어를 읽으라고 권하던 모 대학 교수는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를 뛰어넘는 것을 자신의 목표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귀한 책이 귀하게 대접받기는 힘든 법. 아무리 생각해도 서점에서 표지를 만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알고보니 이름난 정치인이 ‘내 삶을 바꾼 책’으로 꼽았기 때문이란다. 어떻게 <중국철학사>가 ‘내 삶을 바꾼 책’이 될 수 있는 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모르긴 해도 내 삶을 바꾼 책으로 두꺼운 철학사책을 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리어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른바 ‘중국철학’이 어떻게 소비되는가하는 점이다. 중국철학, 이를 동양철학이라 불러도 좋을텐데 어떻게 부르던 사람들은 보통 여기서 마음의 위안을 기대한다.
글쓴이는 <논어>, <노자> 따위의 말이 그토록 위로가 되었단다. 비단 글쓴이만 그런 건 아닐테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여럿 만나보았다. 그러나 거꾸로 공자와 비견되는 소크라테스의 글을 읽고 위안을 얻었다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다. 맹자의 말이 삶의 등불이 되었다는 사람은 들어보았어도 플라톤의 글을 읽고 쓰며 명상한다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장자>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더하면 더했지. 은연중에 사람들은 <장자>에서 무언가 평안과 따뜻함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알고 싶어서보다는, 잘 살고 싶어서 <장자>를 집어들었을 테다. 호기심보다는 기대감이 앞서기 마련이다. 지식보다는 감동을 바란다.
본 강의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무릇 중국철학, 동양고전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하고 말도 느릿하며, 행동거지에 덕이 묻어나는 도덕군자여야 하는데 도무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삶의 교훈이 될 이야기라고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하기는 누군가 그렇게 말하더라. 무릇 <논어>나 <노자> 등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산전수전 겪고 이제 삶을 관조할 나이가 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그러나 그런 태도야 말로 배움과 읽기를 거부하는 틀에 갇힌 사고가 아닐까? 무릇 철학이란 사유의 영토를 개척하는 모험적 학문이 아니었나. 통념과 상식만으로 충분하다면 철학이란 정말 필요 없는 것 가운데 하나일 테다. 그렇기에 철학하는 꼰대란 있을 수 없다. 꼰대는 실험하지 않는 인간이며, 질문을 잃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교훈과 가장 거리가 멀다.
교훈, 사유하지 않고도 줄줄 읊어댈 수 있는 덕목을 기대했다면 미안하게도 번지수가 틀렸다. 미리 이야기하면 장자는 교훈을 모르는 사람이다. 도리어 그는 너무 짓궂어서 교훈이라 불리는 것 따위를 깨뜨리는데 관심이 많다. 일상의 말로 담기지 않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툭 던져주는 인간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知者不言 言者不知, 깨우침이란 말로 옮길 수 없고, 말로 옮길수 있다면 깨우친 게 아니다. 말이 끊어진 막다른 절벽, 여기가 장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곳이다. 그에게 답보다 질문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위에 인용한 글쓴이처럼, 마음의 중심을 찾기 위해 <장자> 등을 읽지 말기를. 아니, 어떤 책에서든 평온과 위안을 기대하지 말기를. 나를 붙잡아 주는 글보다는 나를 흔드는 글이, 마음을 밝혀주는 글보다는 희미한 불빛조차 꺼뜨리는 글이 때로는 더욱 큰 선물이 될 때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답보다는 질문이다. 그리고 쉼없이 달려드는 질문을 견뎌낼 건강함도.
이쯤 되면 저렇게 동양고전으로 마음을 닦았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할테다. <중국철학사>가 건낸 평안과 위안으로 정치라는 험난한 세계를 헤쳐간 사람은 대체 누굴까?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련다. 수인번호 503호로 불리는 사람이라고만 해두자. 맞다. 혼이 정상인 나라를 위해, 우주의 도움을 기대했던 그이가 글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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