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3-24

儀封人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 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為木鐸

 

이을호 역

의 고을 벼슬아치가 만나 보고 싶어하면서 “훌륭한 분들이 이 곳에 올 적마다 나는 만나 뵙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모시고 있던 제자가 만나 뵙도록 하였다.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벼슬자리를 잃고 있는 처지일망정 걱정할 것 없습니다. 천하가 갈 길 몰라 허덕이는 지 이미 오래라, 하늘이 우리 선생님으로 하여금 지도자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임자헌 역

의 땅 국경 관리원이 공자 면담을 청했다. “훌륭한 사람이 이리 오면 제가 안 만난 적이 없어요. 얼굴 한번 보게 해주쇼!” 공자를 모시고 있던 제자들이 면담을 성사시켜주었다. 그가 공자를 만나고 나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댁들도 참, 공자 선생이 벼슬을 잃을까 뭐 그런 걱정을 하고 앉아 있어요?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이오? 이제 곧 하늘이 선생을 시켜 정신 차리게 해줄 것 같구먼.”

<논어집소>, 정태현 등 역

* 孔曰 語諸弟子言 何患於夫子聖德之將喪亡邪 天下之無道已久矣 極衰必盛

孔曰 :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夫子의 聖德이 장차 喪亡(멸망)할 것을 걱정하십니까? 천하가 혼란한 지 이미 오래이니, 衰亂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興盛해지는 것이오.”라고 말한 것이다.

* 孔曰 木鐸 施政教時所振也 言天將命孔子制作法度 以號令於天下

* 言事不常一 盛必有衰 衰極必盛 今天下之衰亂無道亦已久矣 言拯弱興衰屬在夫子

일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쇠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다시 흥성해진다. 지금 천하가 쇠란하여 무도한 지 또한 이미 오래이니, 위란을 구제하고 쇠한 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이 부자에게 달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 喪 謂失位去國

* 或曰 木鐸所以祢于道路 言天使夫子失位 周流四方以行其教 如木鐸之祢于道路也

목탁은 도로를 순시할 때 쓰는 도구이다. 하늘이 공자로 하여금 지위를 잃고 사방으로 두루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가르침을 펴게 한 것은, 마치 목탁이 도로를 순시할 때 쓰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혹자

[혹문] “여러 학자는 ‘상喪’을 ‘斯文의 상실’로 풀이했습니다. 왜 선생님만 ‘지위의 상실’로 풀이하셨습니까?” “이것은 유시독의 설이다. 소식도 이 설에 따랐다. 다만 소식이 ‘하늘이 공자로 하여금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게 하고 한곳에서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한 것은, 마치 목탁이 도로를 순회하도록 만들어진 것과 같다’고 풀이한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옹달메모

– 이을호 역 : 儀封人을 ‘의 고을 벼슬아치’라 풀고 喪을 ‘벼슬자리를 잃고 있는 처지’라 풀어 이 둘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극적인 대비가 이뤄진다. 공자는 벼슬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木鐸 – 지도자’가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 임자헌 역: ‘儀封人請見曰의봉인청견왈’이라 하고 ‘從者見之종자현지’라 음을 달았다. <논어집주> ‘請見 見之之見 賢遍反’을 참고하면 모두 ‘현’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 / 患於喪을 ‘벼슬을 잃을까 머 그런 걱정을 하고’로 풀었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잃고 위나라로 가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본다.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은 풀이로 보인다. / 無道를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풀었다. 재미있다.

– <논어주소>: 여기서 ‘儀’를 위나라 변경으로 옮긴 것은 정현의 주석에서 시작되었는데 정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리링의 <집 잃은 개>의 풀이를 옮긴다. “‘의儀 봉인封人’에 대하여 정현은 의는 위나라 읍인데, 이 ‘의’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와 <수경주水經注: 거수渠水>에서 <서정기西征記>를 인용하여 의는 한대의 준의浚儀이고, 한대의 준의는 지금은 허난성 카이펑開封에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쩌허우의 <논어금독>을 펼쳐보니 카이펑으로 풀이하고 있다. / 하안의 주 이후로 목탁木鐸을 공자가 천하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풀었다. 과연 그런 희망 혹은 기대를 담은 문장인지는 의문이 든다. / 도리어 주목할 만한 것은 天下之無道也久矣를 다시 치세가 열린다는 뜻으로 풀이한 부분이다. 후대의 역사관과 크게 다른 부분. 공자 시대는 난세의 끝이 아니라 난세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한참 더 내려가야 하는 상황.

– <논어집주>에서는 아무개의 풀이를 따라 목탁을 가르침을 펴게 함(行其教)로 풀이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이 풀이가 가장 나아 보인다. 후대 주석가들 특히 고주古注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희망이나 기대감이 <논어>에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혹문]을 참고하면 ‘喪’에 대한 풀이가 크게 둘로 나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는 ‘斯文의 상실’, 이렇게 읽으면 천하의 무도함을 강조하는 풀이가 된다. 또 하나는 위에 언급된 주석/번역처럼 지위/벼슬의 상실로 풀이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자 개인의 불행에 대해 초점을 맞추게 된다.

– 평소 같으면 흘려버렸을 문장이 붙잡아 읽으니 난감하다. 다른 번역을 더 찾아보아야겠으나, 공자가 무도한 천하를 이끌 것이라는 식으로 풀이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자의 방랑/방황에는 어떤 쓸쓸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양화> 등을 참고하면 공자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공자를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더더욱. 따라서 이 문장은 방랑에 처한 공자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그 제자들을 포함한 공자 무리에 대한 평가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천하가 무도하니 하늘이 공자에게 경계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했다는 정도로. <논어>의 유자들은 새 시대를 고대하나 새로운 시대가 열리라는 확신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 오히려 이번에 읽으면서는 왜 이 문장이 여기에 끼여있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다. 위나라에서 경쇠를 쳤다는 문장과 함께 읽어야 하지 않을까? 앞에는 노나라 태사 악에 대해, 뒤에는 순임금의 소에 대한 문장이라는 점을 참고하면 여기서 목탁이란 예악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보면 주희가 살짝 비판한 ‘사문의 상실’로 보는 입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제는 망가진 예악을 그나마 보전하는 사람으로서의 공자 모습.

– 방랑 길 위에 기록된 대부분의 문장이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 벌어진 사건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노나라에서 벼슬을 잃고 위나라로 가던 중간에 벌어진 사건인지, 아니면 또 다른 데서 벌어진 사건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화자, 공자도 제자도 아닌 <논어>에서는 낯선 이 화자의 말로 증언되는 공자 무리의 모습은 근심에 싸여 있다. 이들은 무엇인가를 상실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은 당시의 무도한 시대상황에 비추어 보면 당연하기도 한 일이다. 도리어 하늘은 이들에게 어떤 사명을 남기고 있다. 세계는 불친절하나 그래도 이처럼 이들의 행보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게 있다.

2017. 3. 20 좀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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