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내게는 골목이 변한다는 말이 맞다. 굴러굴러 우연히 들어온 해방촌에 산 지 10년이 되니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옛 이야기를 주절 거릴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망각이란 역시나 힘이 세어, 대체 저 곳이 무엇하는 곳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골목이란 기억되기 보다 변화로 덧칠되기를 욕망하는 곳이어서 그런가?

요즘은 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하는 것이 일이다. 바람도 쇠고, 햇볕도 맞으며 어디 어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빼꼼히 지켜본다. 오늘은 좀 크게 한 바퀴 돌았는데, 며칠 새 또 변화가 있다. 오거리에서 보성여중고 방향으로 커다란 가게 셋이 문을 닫았다. 언제 무엇으로 바뀔지 모르니 사진으로 담아두었다.

남산 도서관 쪽으로 걷는데, 이번에도 공사 소리가 시끄럽다. 종종 들리던 카페 2층에 크게 공사가 한창이다. 골목 쪽으로 벽을 다 드러낸 것을 보니 아마도 커다랗게 창문을 내지 않을지. 가수 정엽이 열었다는 레스토랑, 그래서 후암동 정엽길이라 이름붙인 그곳엔 한층 발빠른 변화가 보인다. 몇 걸음 더 가니, 건물을 통째로 공사하고 있다. 뭐 또 레스토랑 하나가 생기겠지.

신흥시장에 들어오니, 문 닫은 가게 앞에 붙여놓은 광고가 눈에 띈다. ‘세 놓습니다. 대박부동산’ 늘 컴컴하고 상권은 다 죽었다던 시장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아마 ‘신흥시장’이라는 말도 기억 저편으로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지.

문득 시장 구석에 ‘필요하신분 가져가세요’라는 글귀가 보인다. 그릇들이 내놓여 있다. 뒤척거리니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가져가시려고 챙겨둔 것을 건드리는 것은 아닌가 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물건을 내놓으셨단다. 훑어보니 쓰던 물건도 있지만 새 물건도 적지 않다. 접시 몇개와 쟁반 등을 챙겨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간판이 보인다. ‘평남상회’. 여쭤보니 50년이 되었단다. 월남하신 분이다. 고향은 이북. 여쭤보니 역시나 장사를 정리하려고 물건을 내놓았단다. 내 나이가 90인데 장사도 접어야지라지 라며. 여기도 뭐가 들어오나보죠? 모르지, 산 사람이 뭐라도 하겠지.

여기도 건물이 팔렸다. 긴 이야기를 하는 게 실례인가 싶어 길게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리고 모퉁이를 돌아보니 지난 여름 고춧가루를 샀던 집이다. 그 옆도 정리 되었고, 그 옆도 텅 비었다. 그리고 그 옆은 시장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고급진 무슨 의상 디자인실이 있다.

돌아보니 평남상회는 노홍철의 철든책방 바로 코앞이다. 오가는 사람도 늘었을테고, 앞으로도 책방을 들리며 오가는 사람도 많을 텐데 지난 수 년간 파리만 날리던 시장이 좀 활기를 띄지 않을까? 평남상회 자리를 산 사람은 시장에서 무슨 장사를 하려는 걸까? 아니, 시장에 어울리는 건 아닐 것이다. 앞으로의 일이야 모를 일이지만 신흥시장의 미래는 더 이상 ‘시장’은 아닐 테다. 피맛골에서 ‘피마’를 찾을 수 없듯, 해방촌에서 ‘해방’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날도 곧 올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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