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_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1. 기전체紀傳體 : 역사의 날줄과 씨줄

<십팔사략>이라는 책이 있다. 불경스런(?) 이 제목의 책은 본디 원대元代에 편집된 책으로 당대까지의 중국 역사를 축약한 책이다. 총 18개의 역사서를 줄였다고 제목을 <십팔사략>이라 붙였다. 이 가운데 가장 처음에 오는 책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이다. 물론 이후에도 중국의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통상적으로는 청의 건륭제 때 확정된 24사史를 중국의 정사로 본다. 그런데 24사 가운데서도 첫머리가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생몰연대가 불분명하나 대체로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기원전 86년 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는 한무제漢武帝였다. 그는 당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오제五帝 –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과 같은 신화적 인물로부터 시작한다. 그로부터 하夏-은殷-주周를 이어 춘추전국과 진秦-한漢에 이르는 역사를 다룬다. 중국 고대사를 정리한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의 가장 이른 역사를 다루었기에 <사기>가 그 첫머리에 오는 것은 아니다. 시간 순으로 따지면 사마천의 <사기>보다 앞서는 기록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공자의 저작으로 이야기되는 <춘추>가 있다. 흔히 <춘추>와 <사기>는 그 서술 방식으로 비교된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 기록되었다. 연대기 순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역사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편년체의 형식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 기록과는 상당히 다르다. 지금처럼 똑같은 달력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는 보통 군주의 재위를 기준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이를 기준으로 사건을 그대로 나열해놓은 것이 편년체 서술이다. 편년체로 기록된 대표적인 책으로 <조선왕조실록>이 꼽힌다. <실록>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왕의 이름 별로 나뉘어 매해, 매월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책과는 많이 다르다. 연표의 확장판이라고 할까? 어떤 임금이 재위한 후 몇 해, 몇 월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부니 사실 읽는 재미가 별로 없다. 따라서 편년체 서술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역사 사건 기록의 묶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방식을 택한다. 여기서 ‘기전紀傳’이란 사기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부분에서 뽑아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로 <본기本紀>와 <열전列傳>. <본기>는 역대 왕조의 흐름을 따른다. 총 12본기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중국 고대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순서는 이렇다. 각 편마다 ‘본기’가 붙는데 반복 되므로 편의상 빼버렸다. ‘오제-하-은-주-진-진시황-항우-고조(유방)-여태후-효문-효경-효무’

<오제본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중국 고대의 신화적 제왕들의 이야기를 서술한 부분이다. <하-은-주본기>는 흔히 삼대三代라 불리는 중국 고대의 왕조 이야기를 다루었다. 주나라의 몰락 이후를 흔히 춘추전국이라 부르는데 천하는 여러 제후국의 각축장으로 변한다. 그 가운데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진의 역사를 <진본기>에 서술했다. 그리고 이는 천하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진시황>본기로 이어진다. 진의 몰락 이후 항우와 유방은 천하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데 이는 <항우본기>와 <고조본기>에 기록되어있다. <고조본기>는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를 엮은 글이다. 한편 유방 사후 실질적인 권력은 유방의 부인 여태후의 손에 넘어간다. 사마천은 이를 <여태후본기>에서 다루었다. 여태후의 죽음 이후 문제, 경제, 무제로 이어지는데 이는 각각 <효문-효경-효무본기>로 이어진다. 앞에 효孝를 붙인 것은, 오늘날이야 문제, 경제, 무제라고 간결하게 시호를 부르지만 본디 앞에 ‘효’를 붙였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본기>를 맨 처음에 놓았는데 이는 본디 <사기>의 편제가 <본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기도하지만,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기>의 편제를 이야기하면 <사기>는 총 130편으로 이루어져있다. 12 <본기> 다음엔 10 <표表>가 이어진다. 이 <표>는 말 그대로 ‘표’인데 당대의 여러 나라들의 연표를 하나로 묶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본기>에 언급되지 않는 여러 제후국의 역사는 각기 저마다 임금의 재위 기간을 기준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를 따로 볼 경우 당연히 헷갈리기 마련. 따라서 각 나라의 사건을 동시대적 시각 위에서 보기 위해 <표>를 만들었다.

이어 8 <서書>가 있다. 이는 당대의 문화, 사회에 대한 보고서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예서禮書>와 <악서樂書>는 각기 예/악에 대해, <천관서天官書>는 당대의 천문天文에 대해, <봉선서封禪書>는 천자가 하늘에 지낸 봉선제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8 <서>를 통해 우리는 고대 사회의 문화, 사회, 경제 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편 30 <세가>는 제후국의 기록을 담았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국의 천하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본디 ‘천하’라 불리는 문명세계의 중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천하의 지배자를 천자天子라 불렀다. 주周의 통치자가 스스로 하늘의 명(天命)을 받들어 천하를 지배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런데 천하라고 할 수 있을만큼 넓은 땅을 천자 1인이 다스리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새로운 체제가 개발된다. 은殷을 무너뜨리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 주무왕周武王은 공신과 자신의 친족들에게 땅을 떼어 제후로 삼았는데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 줄여 ‘봉건’이라 한다. 중앙에는 천자의 나라가 그 주변에는 여러 제후의 나라가 있는 형태가 주나라 체제의 특징이었다. 이 제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바로 <세가>이다.

이것을 보면 기존의 편년체가 가지고 있던 딱딱한 역사를 보다 풍성하게 기록한 것이 <사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열전>이라는 또 다를 틀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에 담았다. 열전은 총 70편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보통은 사람의 이름을 따 제목을 삼았는데 많은 경우 한 사람이 아니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을 함께 묶어 서술했기에 <열전>은 수백백명의 인물을 다룬다.

종합해보면 <사기> 130편은 총 다섯부분으로 구성된다. 12 <서>, 10 <표>, 8 <서>, 30 <세가>, 70 <열전>으로. 그 가운데 후대 사람들이 크게 사랑한 부분이 바로 <열전>이다. 천자와 제후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전부가 아님을 사마천은 알았던 것이다. 흔히 역사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때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 않는가? 역사란 승리하여 권력의 얻은 자들의 입맛에 따라 서술되기 쉽다. 그러다보니 역사에서 다루는 것이란 국가의 흥망, 통치자의 변고 따위에 그치곤한다. 이처럼 큰 흐름에만 주목하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흔히 ‘미시사’라 불리는 분야의 다양한 연구가 그것이리라.

사마천은 이미 오래전부터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왕조의 교체, 제후국의 흥망성쇠가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이 역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역사가 수많은 삶들이 엮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무늬라면 시대의 날줄만큼 이를 가로지르는 각 인간들의 씨줄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를 놓친다면 날줄만 있고 씨줄은 없는 별볼일 없는 모양이 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할 때, ‘인문人文’이란 사람들이(人) 짜놓은 무늬(文)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의 거친 이 무늬의 모습이란 분명 찬란하게 빛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양한 힘들이 이 빛을 가린다는 데 있다. 시대의 망각이, 권력자의 어두운 욕망이, 때로는 소박한 무관심이 이를 무디게 만든다. 인문학이란 어떻게 보면 그러한 힘에 저항하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답고도 풍성한, 생생한 무늬를 가능한 민감하게 느끼고자 하는.

사마천은 ‘기전체’라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하여 그 무늬를 자신의 글에 담아내고자 했다. 날줄과 씨줄이 엮이는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는 다른 어떤 역사 기록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일찍이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역사의 최고봉이자 운율없는 최고의 시라고.

2.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노라!

문제는 시대의 날줄에 비해 각 개인이 가진 씨줄이 너무도 연약하다는 데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실을 가졌으면 뭐하나. 시대의 날줄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고대인들을 이를 천인天人 관계 속에서 사유하려 하였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 – 하늘의 법칙과 사람의 일.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천도에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찾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에 주목했던 이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하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사마천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다른 열전과 비교해볼 때 <백이열전>은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열전>이란 통상적으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물의 출신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어지는 <관안열전>의 경우 이렇게 시작한다. ‘管仲夷吾者 潁上人也: 관중 이오는 영수 사람이다.’ 그런데 <백이열전>에는 제목과 달리 정작 백이의 이야기가 별로 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백이는 생몰연대가 불분명한 인물이다. 게다가 그의 고향으로 이야기되는 ‘고죽국’이 대체 어디인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역사적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사마천 시대에 이미 백이는 고대 성인聖人 가운데 하나로 숭상되고 있던 인물이다. 전설상의 인물을, 그것도 주周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내세워 <사기열전>을 시작한다.

이는 <백이열전>이 <열전>의 다른 편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백이열전>은 백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글이라기보 보다는, <열전>을 시작하는 글이라 보는 게 옳다. 일종의 <사기열전>의 서문이 되는 글.

사마천은 당대의 문화유산을 언급함으로 시작한다. ‘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藝 詩書雖缺 然夏之文可知也’ 뭇 학자들이 기록해놓은 것이 무척이나 많다. 특히 ‘육예六藝’가 크게 숭상된다. 여기서 ‘육예’란 고대의 문물을 전해주는 여섯 텍스트를 가리킨다. <시>, <서>, <역>, <악>, <예기>, <춘추> . 물론 이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른바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인물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기록 바깥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허유’라는 인물에 관련된 이야기가 그렇다. ‘허유’에 얽힌 이야기는 <장자>에 전해지는데 간단히 내용은 이렇다. 허유가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요임금이 허유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한다. 그런데 허유는 요임금의 제안을 단칼에 거졀한다. 훗날 이 이야기에 더 살이 붙는데 이런 식이다. 천하를 물려받으라는 요임금의 제안이 너무나 혐오스러운 나머지 허유는 강물에 귀를 씻는다.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나중에는 여기에 한 인물이 더해지는데, 바로 소에게 물을 먹는 사람이다. 갑자기 강물에 귀를 씻는 허유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은 자리를 옮긴다. 그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면서.

후대 유가 지식인들에 의해 순에게 왕위를 선양한 요는 성인으로 크게 존숭받는다. 중국의 고대의 이상사회를 요순시대라고도 하지 않나. 이처럼 훌륭한 임금들에 의해 다스린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그런데 유가 문헌에서는 허유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전설처럼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음에도 굴구하고. 사마천은 젊은 시절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는데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던 기산箕山도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허유의 무덤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한편 허유처럼 왕위를 버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오태백과 백이가 그렇다. 이 둘에 대해서는 공자가 이미 짧은 평을 남겼다.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태백은 지극한 덕을 가졌다. 세번이나 천하를 양보했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길을 찾지 못했다. 태백은 고공古公의 첫째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뜻이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그는 남쪽 멀리 도망쳐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살았다 한다. 이후 ‘오吳’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여 ‘오태백’이라 부른다. 이 오나라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한편 오늘의 주인공 백이伯夷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는 고죽국 군주의 첫째 아들이었다. 후대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이지만 임금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첫째보다는 막내를 더 아끼는 경향이 있다. 성정으로 따지면 장자상속이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고죽국의 임금, 백이의 아버지도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위를 물려 받아야 하는 셋째 숙제叔齊가 형을 닮아버렸다는 것이다. 백이가 아버지의 명에따라 숙제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함을 주장하자, 숙제는 장자인 형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이 아버지의 명(父命)을 주장하며 도망치자 숙제도 형을 따라 도망친다. 고죽국의 왕위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둘째에게 넘겨졌다!

이상적으로는 왕위는 현자賢者에게 물려 주는 것이 옳다. 그래서 요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우는 탕에게 물려준다. 그런데 탕에 이르러 현인이 아닌 자식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생겼다. 바로 탕임금의 하夏나라다. 이제 왕위는 선양이 아닌 계승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선양의 다른 측면, 그 자리를 양보하는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백이와 숙제는 선양이라는 고대의 방식을 숭상하며 장자 상속의 방식을 거부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좀 우스운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양보하지 않은 사람에게 권력이 돌아가고 말았으니. 어떻게 보면 세상은 이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떠돌이가 된 두형제는 이어 더 큰 모순을 맞이한다. 그들은 주나라의 서백창西伯昌이라는 이가 늙은이를 잘 모신다(善養老)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로 향한다. 참고로 이 서백창은 오태백이 둘째 동생인 우중虞仲과 함께 도망친 이후 그들 대신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 계력季歷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백이와 숙제가 도착해보니 서백창은 이미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 발發은 아버지를 주문왕周文王으로 올리고 은나라의 폭군 주紂임금을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전쟁에 나아가려는 상황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군대를 일으켜 전쟁에 떠다려는 이들 앞에 등장하여 이렇게 말한다.

‘父死不葬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弒君 可謂仁乎?’
아버지를 장례지내지도 않고 급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효孝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로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인仁이라 할 수 있을까?

<백이열전>에 따르면 아버지의 위패를 싣고 전쟁에 나가려는 상황이었다. 당시 천하의 중앙에는 은殷이 있었고 주周는 서쪽에 위치한 속국이었다. 그런데 속국의 신하로 어떻게 전쟁을 벌일 수 있냐는 질문. 이때 백이와 숙제는 ‘叩馬而諫’ 말고삐를 잡아 끌며 간했다 한다. 생각해보라. 군대를 사열하고 게다가 아버지의 위패를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전쟁에 나서려는 찰나, 비렁뱅이 둘이 난입하여 이 군대를 막아서는 상황을. 그것도 군주의 말 고삐를 잡아 끌며. 병사들이 이를 죽이려 하자 한 인물이 나서며 이렇게 말한다. ‘此義人也’ 의로운 사람이다. 훗날 제나라의 시조가 되는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었다. 결국 주나라는 전쟁에서 이기고 이때 전쟁을 벌였던 발은 주무왕周武王으로 추앙된다.

백이와 숙제는 불의한 전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들은 산에 올라 은둔하여 살며 고사리를 뜯어먹고 살았다. 결국 이들은 수양산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이들의 죽음은 훗날 의로운 사람의 표본으로 숭상되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논어>에도 이들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었으나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을 칭송한다.

‘子貢曰 …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자공이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옛 현인이다. 원망했을까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단 말인가?

공자의 말은 당대의 통상적 이해를 보여준다. 그들은 의로움을 추구하다 굶어죽었다.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다 죽었으니 무엇을 원망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이 찾아내었다는 일시軼詩를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에 의문 부호를 붙인다. 이 시는 훗날 ‘채미가采薇歌’ 즉, 고사리를 뜯는 노래라고 불린다. 사마천은 ‘及餓且死 作歌’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이 시를 지었다고 말한다.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노라.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지만 그것이 그름을 알지 못하는 구나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신농, 우, 하의 시대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가아하나.
于嗟徂兮 命之衰矣 아! 이제 죽는 구나. 명命이 쇠락함이여.

사마천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 怨邪非邪
이 시를 남기고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이것을 보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3. 구름은 용을 따라 나오고 바람은 범을 따라 나온다.

앞서 <사기>는 <본기>에서 굵직한 역사의 흐름을 다루었다고 이야기했다. 은주의 교체도 당연히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를 <백이열전>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백이와 숙제는 여기서 전혀 다르게 등장한다.

서백은 나중에 문왕으로 추존되었는데 … 인자하며 나이 든 사람들을 공경하고 어린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다.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로써 자신을 낮추었는데, 한낮에 식사할 겨를도 없이 선비들을 접대했다. 이에 선비들이 서백에게 많이 몰려들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에 있었는데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가서 서백에게 귀의했다. – <사기본기>, 김원중 역, 민음사. 112쪽.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본기>에 따르면 이미 문왕-서백창이 생존해 있을 때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에 귀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무왕이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를 치는 것도 문왕의 사후 직후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주본기>에 따르면 무왕 즉위 9년에야 군대를 일으켰으며, 막상 전쟁에 나가서도 첫번째에는 그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주무왕은 천명天命을 근거로 군대를 물리는데, 아마도 충분한 세력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제후들이 800명 모였다고 한다.

<은본기>와 <주본기>에는 백이와 숙제처럼 주의 정벌 이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은의 마지막 임금 주의 악행에 대해 자세히 서술할 뿐이다.

주제紂帝는 천부적으로 변별력이 있고 영리하고 민첩하며 견문이 매우 빼어났고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웠다. 지혜는 간언이 필요하지 않았고, 말재주는 허물을 교묘히 감추기 충분했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뽐내며 천하에 그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다.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흠뻑 빠졌으며 여자를 탐했다. 달기妲己를 총애하며 달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 사구에 악공과 광대를 불러 모으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든 후 남녀들을 벌거벗게 하여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 <사기본기>, 100쪽.

‘以酒為池 縣肉為林’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은의 주임금이었다. 그는 매우 사치스러웠으며 게다가 잔혹한 형벌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따라서 무왕의 업적은 매우 의롭고 당연한 것으로 묘사된다. 악인을 처단했으니. 그러나 <사기열전>에서는 이러한 배경이 전혀 무시된다. 도리어 ‘以暴易暴’라는 표현을 통해 주무왕의 은정벌이 잘못된 것임을 이야기한다. <은본기>나 <주본기>의 역사 인식과는 전혀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기>와 <열전>의 이야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적지 않다. 이 불일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시대의 흐름에 요동치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시대의 날줄이 곧고 바른 경우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곧고 반듯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요동치며 굽이치는 경우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여러 폭력에 노출되기 마련이며, 갈등으로 내몰릴 수 밖에.

앞서 <백이열전>을 <사기열전>의 서문이라 말했다. 이는 <사기열전>이 바로 이처럼 난세의 인간에 특히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백이열전>이 그리는 주무왕의 정벌은 ‘난세의 끝 / 치세의 시작’이 아니라 난세의 시작일 뿐이다. ‘채미가’ 끝의 ‘命之衰矣’라는 표현을 기억하자. 주무왕은 천명天命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사마천은 백이의 입을 빌려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내놓고 있다. 무왕의 정벌로 천명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쇠락하게 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열전>의 인물들은 이 쇠락한 시대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삶들이다.

한편 이렇게 기존의 인식을 뒤집어 내놓는 것은 일종의 대결의식의 발현이기도 하다. 백이에 대해 원망함이 없었다고 했던 공자의 말이 정말 맞는 것일까? <열전>은 공자로 대표되는 당대의 보편적 역사관과 대항하며 시작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통해 일종의 출사표를 내놓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겠다. 이를 생각하며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흥미롭다.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열전의 본문에서는 ‘或曰’ 누군가의 말로 되어있으나 오늘날에 이 문장은 <노자>에 실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의 도는 특별히 누군가를 아끼는 것이 없으나 늘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백이와 숙제는 선인善人이라면서 왜 그들은 굶어 죽었는가?

한편 이렇게 평가한 공자의 삶을 보자.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연이라는 제자가 있다. 공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가장 훌륭한 제자로 손꼽혔음에도 가난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것뿐인가?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러니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하늘이 선하나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어째서 늘 이렇단 말인가? 하늘이 함께 하는 것이 맞나?

그것 뿐이라면 그나마 괜찮을지 모르겠다. 악한 짓으로 유명한 도척盜蹠을 보라.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천수를 누리고 죽은 그는 대체 무슨 덕으로 그렇게 무도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그것뿐인가? 사마천 당대에도 그런 비슷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악한 짓을 하면서도 호강하며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한스럽거늘 그렇게 부정하게 쌓은 부를 대를 이어 물려주기까지한다. 도리어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화를 입기 십상이다.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대체 하늘의 도(天道)란 옳은가 그른가? 이른바 천도를 주장하는 이들은 마땅히 이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늘은 이렇게 천도를 따라 사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역사를 보니 그렇지 않더라. 당신들이 주장하던 그 천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이것이 <백이열전>을 통해 사마천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다고 사마천이 도척처럼 멋대로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천도에 의거하지 않고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 사마천은 가의賈誼의 말을 빌려 자신이 그 길을 개척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흘린다. ‘同明相照 同類相求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睹’ 함께 빛나는 것은 서로를 비추고 같은 부류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구름이 용을 따라 나오고 바람이 범을 따라 나오듯, 성인이 일어나자 만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이 이들 선인에게 보응을 해주지 못한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貪夫徇財 烈士徇名’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열사烈士, 굳센 선비는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름(名)이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름이 의미있기 마련이다. 지인知人,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이름도 빛을 발한다.

伯夷叔齊雖賢 得夫子而名益彰 顏淵雖篤學 附驥尾而行益顯 巖穴之士 趣舍有時若此 類名堙滅而不稱 悲夫 閭巷之人 欲砥行立名者 非附青雲之士 惡能施于後世
백이와 숙제가 비록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으나 공자가 그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그들의 이름이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안연이 바록 학문에 매진했으나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공자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저들은 모두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인해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지금 굴 속에 숨어 있는 선비들,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고자 몸을 숨기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이 사라져 불리지 않으니 안타깝지 않은가! 좁은 골목에 살면서도 그 뜻이 높고 그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사람은 ‘청운지사青雲之士’가 있을 때야 비로소 후세에 이름을 떨치리라.

청운지사青雲之士란 바로 사마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테다. 가의의 말을 기억하자. 구름과 바람이 용과 범을 따라 일어난다. 그처럼 이제 자신도 용과 범 같은 이들을 불러내고자 한다. 한편 이는 앞서 공자가 했던 것에 견줄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가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듯. 그러나 사마천은 그와 똑같은 입장에서 이들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힌다. 자신도 공자처럼 이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려고 하나 공자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작업을 ‘성일가지언成一家之言’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기록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포부에 그치지 않는다. ‘제자백가諸子百家’ 고대의 그 빛나는 사상가의 자리에 버금가는 자리에 자신도 오르겠다는 강렬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앞서 ‘同明相照 同類相求’라 했다. 이들의 찬란한 삶을 <열전>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이를 서술한 자신 역시 그와 동일하게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聖人作而萬物睹’ 만물이 제 모습을 밝게 드러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로 성인이 있기에 그렇다.

 

4. 부모가 나를 낳았으나

<사기열전>에서 다루는 인물을 보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단 시대적으로 볼 때에 균형이 깨어져있다. 앞서 <사기>는 ‘오제’라는 고대의 신화적 제왕으로 시작하여 당대, 한무제까지의 역사를 담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열전>이 다루는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다. ‘춘추전국’이라 불리는 혼란기에 활약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진한秦漢 교체기, 한漢 초기의 인물까지 다루고 있다. 어째서 <열전>에서는 그 절반만 다루는 것일까? 날줄과 씨줄의 비유를 빌리면 <사기>라는 커다란 직조물 가운데 앞의 절반은 씨줄 없이 날줄만 있는건 아닐까?

그러나 반대로 이렇기에 <본기>보다는 <열전>이 후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본기>와 <세가>의 인물들이 ‘역사’라는 틀에 갇혀있다면 <열전>의 인물들은 그 틀을 넘나들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명문도 이 <열전>에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익히 들어온 고사들도 이 <열전>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백이열전>이 <사기열전>의 서문이자, 사마천의 출사표와도 같은 글이라고 한다면, <관안열전>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첫머리에 있는 인물은 ‘관중’이다. ‘관중’은 중국 고대로부터 명재상으로 손꼽힌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제환공을 당대의 패자霸者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패자란 주왕실이 힘을 잃은 이후 제후들을 한데 모아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물을 가리킨다. 맹자는 이를 ‘以力假仁者’라고 폄하하긴 했으나 공자는 덕분에 오랑캐의 침입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참고로 춘추시대에는 다섯의 패자가 있었다고 한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합려, 월왕구천이 꼽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제환공은 패자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만든 것은 관중의 업적이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관중은 제환공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태공세가>에 이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는 제양공讓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제양공은 매우 무도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배다른 동생인 문강文姜과 정을 통하는 관계였다. 동생이 이웃 노나라에 시집을 가서도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의 노나라 군주는 노환공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아채고 부인에게 화를 냈다. 이에 문강과 제양공은 노환공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둘의 관계가 이웃 군주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과까지 낳은 것. 당연히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주변의 인물도 양공의 손에 죽임당하기 일수였다.

공자公子 규糾와 소백小白은 각각 제양공의 동생이었는데 이웃나라에 도망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차 제양공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제 제나라의 다음 임금이 누가 되느냐가 문제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먼저 귀국하여 자리에 오르는 자가 군주가 되는 형국이었다. 이때 공자 규는 노나라에 있었고 관중과 소홀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공자 소백은 거나라에 있었는데 포숙이 따르고 있었다. 군주의 자리를 두고 이제 형제가 싸워야 하는 상황. 관중은 몰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제나라로 입국하려는 소백을 암살하려 한다. 관중이 쏜 활에 소백이 맞았는데 허리띠의 장식 부분에 맞았다. 관중은 소백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돌아가 공자 규와 느긋하게 귀국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소백은 자신의 생존을 비밀에 부치고 몰래 귀국하여 군주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그는 제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노나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공자 규는 형제라 차마 주살하지 못하겠으니 노후魯侯께서 직접 그를 죽이기를 청한다. 소홀과 관중은 원수이니 청컨대 그들을 잡아 젓갈을 담는 형벌에 처하여 마음을 달래려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노나라를 포위하겠다.’ 결국 공자 규는 독살 당하고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관중만 남은 상황. 이때 거나라에서부터 그를 보좌했던 포숙이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臣幸得從君 君竟以立 君之尊 臣無以增君 君將治齊 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 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國國重 不可失也’ 이렇게 하여 포숙의 천거로 관중은 일급 죄수에서 한 나라의 재상으로 하루 아침에 그 자리를 바꾸게 된다.

바로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가 이것이다. 흔히 ‘관포지교’라고 하면 친한 벗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기열전>의 기록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워낙 유명한 고사이므로 그 원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管仲夷吾者 潁上人也 少時常與鮑叔牙游 鮑叔知其賢 管仲貧困 常欺鮑叔 鮑叔終善遇之 不以為言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 管仲事公子糾 及小白立為桓公 公子糾死 管仲囚焉 鮑叔遂進管仲 管仲既用 任政於齊 齊桓公以霸 九合諸侯 一匡天下 管仲之謀也
管仲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為貪 知我貧也 吾嘗為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為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為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為無恥 知我不羞小睗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鮑叔既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為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관중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관중과 포숙아의 관계는 대단히 일방적이다. 관중이 겪은 다양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포숙아는 늘 관중의 편이었다. 이쯤되면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다는 관중의 능력보다 이 관중을 끝까지 믿어준 포숙아의 인품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그래서 관중은 이렇게 말한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부모가 나를 낳았고, 포숙아가 나를 알아주었다. 대구로 이어지는 이 짧은 표현은 짜릿한 울림을 선물해준다. 부모가 생명을 주었듯 그에 버금가는 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나. 단순히 생물학적 삶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기에.

그런데 이어서 사마천은 이렇게 서술한다.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그토록 뛰어나다는 관중의 재능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아의 능력이 훨씬 훌륭하다고. 그렇다고 관중의 역량이 별볼일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의 업적은 탁월한 것이어서 시대에 커다란 획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管仲既任政相齊 以區區之齊在海濱 通貨積財 富國彊兵 與俗同好惡’ 눈에 익은 표현이 나온다. ‘富國彊兵’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다. 관중이야 말로 부국강병의 시대를 연 인물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한 인물의 역량에 의해 한 나라의 국운이 결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천하의 나라들이 서로 인재를 불러모아야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관중 덕분에 제나라는 천하에 위세를 떨치는 나라로 탈바꿈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에도 끝까지 살아 남았던 것이 제나라였다.

 

5. 나는 그의 마부라도 되고 싶다.

관중과 함께 소개되는 안영 역시 제나라의 이름난 재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시대는 관중의 시대와 사뭇 크게 달랐다. 안영은 제영공, 장공, 경공의 삼대 동안 재상으로 있었는데 당시 제나라는 쇠락의 길을 겪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제장공이다.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최저라는 인물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최저는 당공棠公이라는 인물이 죽자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그런데 장공이 그만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어찌나 푹 빠졌는지 최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최저의 갓을 다른 사람에게 줄 정도였다. 다음은 <세가>에 실린 장공의 마지막 날 모습이다.

을해일에 장공이 최저에 가서 문병하고는 최저의 아내를 찾았다. 최저의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최저와 함께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공은 기둥을 안고 노래했다. 환관 가거가 장공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대문 밖으로 막고 들어와 대문을 잠그니 최저의 부하들이 무기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 장공이 대 위로 올라가 포위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천지신명에도 맹세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 주지 않았다. 이에 종묘에서 자살하겠다고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 장공이 담을 넘으려고 하자 화살이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거꾸로 떨어져 내려오자 죽여 버렸다. 
… 안영은 들어가서 장공의 시신을 베개 삼아 곡을 한 다음 예에 따라 세번 뛰더니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최저에게 말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최저가 말했다.
“백성들이 받드는 자이니, 그를 내버려 두면 민심을 얻을 수 있다.” 
- <사기세가>, 98쪽.

<사기열전>이 <백이열전>에서 시작하며 사마천이 이를 통해 난세라는 배경에 주목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난세란 무엇인가? 말을 그대로 옮기면 ‘어지러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나, 무엇이 그 어지러움을 낳았는가가 중요하다. 기존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존의 가치도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 본디 주나라의 체제에서는 중앙의 천자와 주변의 제후국 간에 상하 관계가 명확했다. 그러나 주 왕실의 몰락으로 그 관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그러한 현상은 제후국 내부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는데 바로 제나라의 대부인 최저가 임금인 장공을 시해한 사건이 그렇다.

시해弑害란 아랫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윗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齊太史書曰 崔杼弒莊公 崔杼殺之 其弟復書 崔杼復殺之 少弟復書 崔杼乃捨之’ 태사는 역사 기록을 관장한 인물이었는데 이들은 이렇게 적었다.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 이를 보고 최저가 죽였으나 그의 동생이, 또 죽였으나 다시 그 동생이 똑같이 기록하자 멈추고 말았다. 과거의 실상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실록實錄’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목숨을 걸고 기록을 남긴 사관의 의기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제나라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안영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의 군주가 바뀌는 일이 벌어지고만다. 제나라는 그대로이나 군주의 가계가 바뀐 것. 제나라의 황금기를 연 관중과 제나라의 몰락을 보여주는 안영을 함께 열거한 것은 어째서일까? ‘제나라의 재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둘은 너무도 다르지 않나?

업적으로만 따지면 안영보다 관중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중은 이후 대대로 훌륭한 재상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니. 그러나 사마천은 안영에게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의 마부가 되어도 좋다는 정도로. 그것은 먼저 관중에 비해 안영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월석보와 안영의 이야기를 보자. 월석보가 죄인이 되었을 때 안영은 그가 비범한 인물인줄 알고 자신의 말을 풀어 그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월석보에게 별 예우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월석보가 집을 떠나려하자 안영이 이렇게 말한다.

嬰雖不仁 免子於緦何子求絕之速也

내가 비록 모자른 사람이지만 당신을 저 옥중에서 꺼내주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월석보의 대답이 걸작이다.

不然 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 方吾在縲紲中 彼不知我也 夫子既已感寤而贖我 是知己 知己而無禮 固不如在縲紲之中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뜻을 굽히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치는 법. 당신이 나를 옥중에서 꺼내주었으니 나를 안다는 것인데 나를 알아주면서도 무례하다면 이는 옥중에 갇혀 있는 것만 못하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전체에 흐르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여기서 명확히 드러난다. 누군가를 알아준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럴뿐이라면 무시하는 것만 못하다. 그에 합당한 태도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굴욕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기열전>이 이야기하는 ‘알아줌’이란 예를 갖추어 대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까지 포괄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게 문제는 아니다. 본디 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서 억울한 게 아니다. 문제는 알아주는 자들이 그에 합당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 못할 때에 문제다. 나를 알았기에 그에 합당한 태도를 나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

이어지는 또 다른 고사는 안영의 마부 이야기이다. 이른바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식으로 재상 안연의 마부라고 뻐기고 다녔나보다. 그의 아내는 그의 허위를 보고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 안자-안영을 보라. 그는 비록 키도 작고 볼품 없지만 그가 품은 뜻은 높고 늘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품은 뜻도 없으면서 스스로 의기양양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에 마부는 자신의 태도를 고치고 그 결과 안영의 눈에 들어 대부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마천은 평생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고하게 사형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사마천은 형벌의 치욕을 홀로 견뎠다. 그런 그이기에 월석보를 풀어주고, 겸양을 배운 자신의 마부를 대부로 올려준 안영의 이야기에 탐복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그가 높이사는 것은 안영의 높은 기개다. 비록 안영의 힘이 제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고 하나 그는 최저의 집에 죽은 장공의 시신 앞에 울음을 감추지 않을 정도로 의기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태도를 두고 ‘見義不為無勇’이라 폄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사마천은 이렇게 평가한다. ‘至其諫說 犯君之顏 此所謂 進思盡忠 退思補過 者哉 假令晏子而在 余雖為之執鞭 所忻慕焉’ 犯君之顏! 그는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간언을 했다. 보디 간언이란 군주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기 마련인법. 안영은 그것을 잘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좌전>에 실린 기록이다.

제나라 임금(경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온 뒤, 안자가 천대에서 시종하고 있었다. 이때 양구거가 수레를 타고 도착하였다. 임금이 안자에게 말했다. “오직 양구거만은 나와 화합하고(和)있다.” “그도 역시 뇌동(同)하고 있습니다. 어찌 화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화합과 뇌동은 다른가?” “다릅니다. 화합이란 마치 국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물, 불, 식초, 젓갈, 소금, 매실 등을 준비하여 생선과 고기를 요리하는데, 한 사람이 장작으로 불을 때면 요리사는 양념을 합니다. 간을 맞추면서 부족한 것은 더 넣고, 지나친 것은 묽게 합니다. 군자(임금)는 그런 국을 먹고 마음을 평정하게 합니다. 군신 관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임금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그른 점이 내재할 경우, 신하는 그 그른 점을 지적함으로써 옳은 일을 잘 성취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임금이 그르다고 여기는 일에 옳은 점이 내재할 경우, 신하는 그 옳은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른 일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럼으로써 정치가 평정되어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되면, 백성은 불평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 <논어집주>, 박성규 역, 소나무. 538쪽 각주 2번에서 옮김.

공자는 일찍이’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 하였다. 이를 보면 안영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을 추구했던 인물인 셈.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스로를 부동不同, 즉 동일성을 깨뜨리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정치에서 늘 ‘화합和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과연 무엇이 화합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내편이 되라는 것이 화합인가? 나와 다르지만 적당히 어울리자는 게 화합인가? 범안犯顏, 상대의 안색을 거스르는 것이 화和의 본질임을 안영은 이야기한다.

 

6. 하나를 내주고 둘을 취할 것

전국戰國, 말 그대로 각국이 서로의 세력을 다투며 전쟁을 벌이는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 각국의 목표는 강력한 힘으로 상대 국가를 제압하는 것. 오늘날이야 군대의 질과 양으로 승부가 나겠지만 당대에는 전략과 전술이 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훗날 병법가兵法家라 불리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孫武였다.

그러나 병법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일원화된 통제 시스템이라 하겠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일된 움직임으로 전장에서 구현해내지 않으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형식의 관계, 윤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손무와 오왕 합려의 이야기는 어떻게 군대가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 기초적인 명령에 따라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군대의 출발이다.

손무는 합려의 요청에 따라 궁녀들을 모아놓고 기본적인 훈련을 시킨다. 문제는 이들이 손무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까르르 웃을 뿐이라는 데 있다. 이에 손무의 말. ‘約束不明 申令不熟 將之罪也’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려 숙지하게 하고는 다시 시도를 하나 이번엔 더 크게 웃을 뿐이다. 이때 손무의 날카로운 말이 날아든다. ‘約束不明 申令不熟 將之罪也 既已明而不如法者 吏士之罪也’ 흥미롭게도 여기서 하나의 전환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이 반복되어 명확해지고 익숙해지면 법法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법칙. 법에는 형벌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점.

이에 손무는 좌우 대장으로 삼은 합려의 애첩을 배려한다. 합려가 크게 놀라 이를 막으려 하는데도 손무는 거침없다. ‘臣既已受命為將 將在軍 君命有所不受’ 장군으로 군주의 명을 받은 이상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명을 받을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 결국 두 애첩의 목을 베어버리고 만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군령, 법의 두려움을 안 이상 이를 따를 수 밖에. 婦人左右前後跪起皆中規矩繩墨 無敢出聲.

법法과 예禮는 예로부터 대립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 예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에 의거하여 특히 상하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반해, 법은 전통을 단절하고 상하의 관계로 규정되는 권위에 도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법가로 부터 개혁적 정신을 찾으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중에 전통을 상징하는 군주의 권력에 턱밑까지 도전하는 법가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손자-손무’는 병가의 특징을 설명하는 역할로 등장했다면 이 <열전>에서 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은 바로 손빈孫臏이다. 손무와 손빈은 모두 같은 집안 사람이나 그들의 이름은 각기 특정한 의미를 상징한다. 손무가 이름 그대로 무武, 전쟁의 화신이라면, 빈臏은 형벌의 일종의로 무릎뼈를 제거해 버린 것을 가리킨다. 손빈이라는 이름은 그 형벌로 걷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이야기한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가 워낙 빼어난 능력을 가졌던 까닭에 다른 사람을 시기를 샀기 때문이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방연龐涓이었다. 그는 손빈에게 죄를 씌워 무릎뼈를 빼내는 형벌을 받게하고 얼굴에 죄형을 새기는 ‘경黥’형을 받게 만든다. 불굴의 몸이 된 그는 이웃 제나라에가 몸을 의탁한다. 그를 받아준 것은 제나라의 장수 전기田忌였다. 그는 이후 전기의 모사가되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손빈이 전기의 마음을 사게 만든 마차경주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는 세 마리 말로 치러지는 이 경주에서 서로가 비슷한 능력의 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각 셋이 상중하로 능력이 나뉜다는 점을 알고는 이렇게 말한다. ‘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 取君上駟與彼中駟 取君中駟與彼下駟’ 결국 전기는 이 마차 내기에서 큰 돈을 번다. 당연한듯 보이는 손빈의 계책에 숨어 있는 지혜란 하나를 주고 둘을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를 내주어 상대의 주의를 끌고 그 틈에 헛점을 노리는 법!

그의 이런 병법은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위나라의 군대가 제나라를 업신여기는 형세를 이용하여 이를 뒤집는다. 매일 병사의 수가 줄어든 것처럼 상대를 속이고 이 틈에 위나라 군대를 협곡으로 이끌어낸다. 바로 그 유명한 마릉 전투가 이것이다. 그는 양쪽에 군사를 매복해놓고는 중앙의 커다란 나무에 껍질을 벗겨놓고 이렇게 쓴다. ‘龐涓死于此樹之下’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을 것이다. 군자를 이끌고 앞장서 마릉의 협곡으로 들어온 방연은 커다란 나무에 무엇인가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횃불을 밝혀 이를 확인한다. 이를 대비한 손빈의 말. ‘暮見火舉而俱發’ 밤에 불빛을 보면 일제히 쏘라!

‘龐涓果夜至斫木下 見白書 乃鉆火燭之 讀其書未畢 齊軍萬弩俱發 魏軍大亂相失 龐涓自知智窮兵敗 乃自剄 曰 遂成豎子之名’ 방연이 자결하며 한 말로 손빈의 복수에 마침표가 찍힌다. ‘遂成豎子之名’ 손빈은 상대의 헛점을 노리는 병법으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뿐이었다면 손빈은 단순히 빼어난 병법으로만 기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극적인 장면을 마지막에 삽입함으로써 제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을 손빈의 복수로 화려하게 매듭짓는다.

이어서 소개되는 또다른 병법가 오기 역시 손빈과 비슷하다. 오기는 어쩌면 손빈보다 훨씬 잔혹한 인물이다. 노나라에서 자신의 처가 제나라 출신이라는 점으로 의심을 받자 자신의 아내를 죽일 정도였다. 그뿐인가. 그는 장군으로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 속에 숨어있는 비밀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장군이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는 고름을 빨아줌으로 병사의 목숨을 샀다. 단순히 빼앗으려 하면 적게얻지만 조금 주면 큰 것을 얻는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그의 어머지는 크게 슬퍼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

‘非然也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손무, 손빈, 오기로 이어지는 병법의 전환! 약속의 반복으로 법을 만들고 형벌로 그 법을 시행케 한다. 그러나 이는 하수의 법, 시작할 때의 방법이다. 손무와 오기는 이제 병사의 목을 베지 않고도 상대의 목숨을 사는 법을 깨우쳤다. 주어라! 그러면 상대가 더 큰 것을 내어줄 것이니.

앞서 언급했 듯 법가/병법가는 군주의 권력을 때로 위협하기도 했다. 군주의 자리야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권력은 이들을 결코 곱게보지 않았다. 오기도 초나라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으나 그를 시기했던 이들도 그만큼 많았다. 及悼王死 宗室大臣作亂而攻吳起 吳起走之王尸而伏之 擊起之徒因射刺吳起 并中悼王 悼王既葬 太子立 乃使令尹盡誅射吳起而并中王尸者 坐射起而夷宗死者七十餘家

여기 죽음을 앞두고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을 번뜩인 인물이 있다. 오기는 절체절명의 순간 도왕의 시신에 엎드림으로 자신의 복수를 예비한다. 자신을 쏘아죽인 이들은 언제가 이 활로 멸할 것이다! 그의 예견처럼 그를 쏘아죽인 이들은 선왕의 시신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커다란 재앙을 맞는다. 어쩌면 오기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목숨으로 무엇을 얻을지 계산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목숨을 내놓는 대신 70여가 종실과 대신들의 목숨을 가져가리라!

<사기열전>을 읽으며 놀라는 것은 그가 단순히 역사의 인물을 시대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흐름에서 어떤 삶의 특정한 면을 조망하기 때문이다. 손빈이 방연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 벌어진 그 세세한 묘사를 보라. 과연 그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 다양한 고대의 문헌을 참고했으며 직접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했다. 그러나 이를 저런 간결한 문장으로 완성한 것은 오직 사마천 한 사람의 공일 것이다.

대체 사마천은 왜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일까? 복수!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의 삶이 찬란하게 빛나고 가장 주목되는 장면이 거기에 얽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결코 전장에서 벌어지는 각국의 거대한 싸움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거대한 전쟁 속에도 인물들의 욕망이 넘실대고 있다. 그 넘실대는 욕망의 한 자락에 언뜻 보이는 생의 날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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