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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선농인문학서당 《논어》 4강 – 스승의 초상

1. 학문學問이란 무엇인가?

유가儒家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배움(學)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따라서 학문學問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려면 유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는데 바로 말의 쓰임이다. 오늘날에 학문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는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습득하는 전문지식을 가리킨다. 그 지식, 더 좁게 말하면 전공지식을 학문이라 지칭하곤한다. 그러나 본디 이 말의 쓰임은 근대 학문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하였다.
《주역》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君子 學以聚之 問以辯之 寬以居之 仁以行之’ 풀이하면 이렇다. 군자는 배움으로 모으고, 물어서 명확히 구분하며, 너그럽게 지내고, 인으로 실천한다. 이를 앎과 실천, 즉 지행知行으로 구분하면 앞의 둘은 앎을, 뒤의 둘은 실천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의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본디 학문이란 실천과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목표가 군자라는 인격을 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야 지식이 무엇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만 과거에는 어떤 인격과 삶을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무엇을 배우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학문’이란 곧 이 방법과 태도에 대한 말이다. 어떤 지식을 익힌다고 했을 때 ‘배움-學’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습득해야 하며, 이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묻고 따져봐야-問’ 한다.
《논어》를 두고 이야기하면 ‘배움’은 우선 단순히 ‘보고 듣는 것-見聞’과 다르다. 오늘날에도 견문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인간은 보고 듣는 감각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단순한 경험에 멈춰서는 안 된다. 이를 따져보고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한편 《논어》에서는 이를 ‘자신의 생각-思’과 구분지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생각없는 사람이야 어디있겠냐만 특정한 버릇을 가리켜 생각이라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슨 말이냐면 생각해온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 밤을 새워 생각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더라고. 다르게 말하면 배움이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내 사유의 버릇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또 다른 힘과의 만남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고 따져보는-問’ 일은 무엇일까? 위에서 이야기했듯 배움이란 본시 완벽하게 개별적이고 능동적인 게 아니다. 자기 경험의 한계와 생각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일이 나로부터 출발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이에 비해 묻고 따져보는 일은 배우는 사람에게 오롯이 달려있는 일이다. 그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반응, 적극성, 철저한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배움이 본질적으로 어떤 힘과의 만남이라면 질문이란 이 힘과의 만남 가운데 벌어지는 역동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로 돌아오면 제자들은 공자를 통해 배웠으며, 공자와 질문을 주고 받았다. 따라서 《논어》란 공자와 제자들이 남긴 학문學問의 흔적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많은 사람들은 맹자야 말로 공자를 계승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맹자는 유가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주제를 놓고 보면 맹자는 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에서 진지함보다는 열정을 발견하기 쉽고,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문답보다는 변론이라 부르는 게 적당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학문이라는 주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이다. 그는 맹자의 그늘에 가려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지만 학문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훌륭한 글을 남겼다.
그의 저술 《순자: 권학편》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군자가 말하기를 ‘학문이란 도중에 그만둘 수가 없다. 푸른 물감은 쪽풀에서 얻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되지만 물보다 더 차다’고 한다. …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것을 알지 못하며 깊은 골짜기에 나아가서보지 않으면 땅이 두터운 것을 알지 못하며 선왕이 남긴 말을 듣지 않으면 학문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
– 《순자 1》, 이운구 옮김, 한길사

여기서 그 유명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나왔다. 보통 스승보다 더 뛰어난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본디 뜻은 각자가 타고난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됨을 의미한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이것이 학문이다. 따라서 이 척도는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각기 타고난 능력이란 다르므로.
예전엔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정작 살아보니 별로 맞는 말은 아니더라. 오늘날 회자되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깨우치는 속도나 타고난 성품이 얼마나 차이나는지… 고로 엄친아는 정말로 있다! 그런면에서 똑같은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폭력인가. 저마다 같은 크기의 노력을 하더라도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출발점에서 얼마라도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청출어람! 순자는 이것, 자신을 벗어나는 데 어떤 길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학문이 그것이다.

나는 일찍이 하루 종일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잠깐 동안 배운 것만 못하였다. 나는 일찍이 발돋움하여 멀리 바라보려고 하였으나 높은 데 올라가 넓게 내다보는 것만 못하였다.
– 같은 책

다르게 말하면 배움이란 곧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기가 홀로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별적인 능력의 한계란 자명하다. 그렇다고 그 한계를 벗어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거인이 아니면,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면 될 일이다. 그러면 적어도 그와 동일한 시선의 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관점이라는 말을 빌리면, 배움이란 남과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의 키를 늘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더 좋은 방법으로는 높은 곳에 올라서면 된다. 바로 옛 사람의 글과 행적을 통해!
 

2. 마치 산을 쌓아 올리듯

子曰 譬如為山 未成一簣 止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吾往也

학문이란 원대한 일이다. 공자는 말한다. 학문이란 마치 산을 쌓는 것과도 같다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의 산을 다 쌓아놓고도 멈춰 버린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산을 쌓아보겠다고 평지에 홀로 흙 무더기를 쌓기도 한다. 비유라지만 어디 산을 쌓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것은 한 사람의 짧은 생애로는 결코 불가능해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일을 이루어내는 사람이 종종있어 놀라곤 한다. 그러나 염두해둘 것은 누구도 그것을 ‘산’이라 단정지어 이름 붙이기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 산을 쌓은 그 사람도 한참이 지나서야 자기가 쌓아 올린 것이 거대한 산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아니면 결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순자도 이 공자의 말에 주목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흙이 쌓여 산을 이루면 바람과 비가 일고 물이 괴어 깊은 못이 되면 이무기와 용이 살고 선을 쌓아 덕을 이루면 저절로 신명에 통하여 성인의 마음이 갖추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한 걸음씩 쌓아나가지 않으면 천리를 갈 수 없으며 작은 흐름(물줄기)이 모이지 않으면 강이나 바다를 이룰 수 없다.
– 같은 책

학문이란 마치 산을 쌓는 것과도 같고 바다를 만드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은 산의 크기와 바다의 넓이에 압도될테지만 순자는 그 시작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어쨌건 산도 흙을 모아 이룬 것이며 바다도 물줄기를 모아 만든 것이다. 한 걸음씩 모아 천리를 가는 것처럼. 《중용》이라는 책의 말을 빌리면 등고자비登高自卑!! 아무리 높은 산을 오르는 일도 바로 낮은 길에서 시작한다. 한 걸음을 가야 천리길을 간다. 꾸준함이야 말로 학문에 있어 가장 큰 미덕이다. 그래서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기기가 한번 크게 뛴다고 하더라도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노둔한 말일지라도 열흘 달리면 역시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데 있다. 새기다가 중도에 그만두면 썩은 나무도 부러지지 않는다. 새기고 새겨서 쉬지 않으면 금속류나 돌도 아로새길 수 있다.
– 같은 책

‘기기’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말도 크게 뛰어 열 걸음을 나아가는 건 아니다. 아무리 느린말도 열흘을 가면 천리마가 간 것에 미칠 수 있다. 문제는 끝까지 가느냐의 여부다. 노력하는 만큼 얻는다. 그러나 주의하자. 노력한다고 모두가 똑같은 것을 얻을 수는 없으니. 그 수고로움을 이겨냈을 때, 그만큼을 얻어간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타고난 재주를 가진데다, 성실함까지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그건 내가 아니다. 그는 그, 나는 나. 나의 삶에서 꾸준히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이어지는 말을 보자.

지렁이는 발톱과 어금니의 날카로움이나 근육과 뼈대의 억셈이 없으나 위로 진흙을 먹고 아래로 땅 밑의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정신을 집중시켜 쓰기 때문이다. 게는 발이 여덟 개고 집게발이 두 개지만 뱀장어의 굴이 아니면 몸을 맡길 데가 없는 것은 마음 씀이 산만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힘을 기울일 뜻이 없는 자는 뚜렷하게 알려질 명성이 없고 묵묵히 정성들여 일하지 않는 자는 혁혁히 빛나는 공이 없다.

지렁이야 말로 위대하다! 그는 날카로운 이빨과 근육이 없음에도 땅을 휘젓고 다닌다. 딱딱한 껍질과 그 많은 다리를 가진 게는 갈팡질팡 하는 것에 비해. 지렁이는 지렁이의 방법으로 천리를 간다! 여기서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힘을 기울일 뜻이 없는 자는 뚜렷하게 알려질 명성이 없고 묵묵히 정성들여 일하지 않는 자는 혁혁히 및나는 공이 없다’로 번역된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是故無冥冥之志者,無昭昭之明;無惛惛之事者,無赫赫之功。어떻게 보면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드러나지 않는 뜻과 일이 있어야 사람들의 눈에 띄는 지혜와 공적을 이룰 수 있다. 즉 남들이 알지 못하는 뜻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소중한 것은 감춰져있기 마련이다. 아니,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남들 눈에 빛나지 않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冥冥之志!!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논어》의 많은 번역서 가운데 중국 학자 리링의 번역서가 있다. 그런데 이 《논어》 번역은 제목이 《논어》가 아니다. 우리 나라 말로 《집 잃은 개》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喪家狗’, 제목 그대로 뜻은 ‘집을 잃은 개’라는 뜻이다. 누군가 천하를 방랑하는 공자를 두고 한 말이라 전해진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껄껄 웃으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좋은 말이 아니기에 이 말을 두고 많은 소란이 있었다. 이런 발칙한 제목을 지었던 까닭에 저자는 적지않게 욕을 먹었다. 성인 공자를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느냐는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야 말로 공자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그는 하늘이 자신에게 맡긴 사명이 있다며 당당하게 처신하는 것처럼 보이나,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다고 말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끝내 팔리지 않는 옥이었다. 그의 방랑길이 얼마나 처량했던지 그는 자칫 고향도 아닌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수도 있었다.

子疾病 子路使門人為臣 病閒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為有臣 吾誰欺 欺天乎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자로가 서둘러 스승의 죽음을 예비했다. 후배 제자들을 신하로 삼았다. 가신家臣, 집안에 신하를 둔 대부大夫의 법도대로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승을 사랑했던 제자는 스승이 초라한 죽음을 맞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은 차도가 있자 이 제자를 나무란다. 그렇게 꾸며대는 것이야 말로 거짓이 아니냐! 누군가는 나 공구孔丘의 죽음을 초라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여러 제자들이 있다. 이들의 품에서 죽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게 아니냐. 공자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子在川上 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강물을 보고 공자가 했던 이 말에는 많은 해설이 있다. 과연 공자는 흐르는 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0년이 넘는 길고 긴 방랑길을 돌아보며 아쉬움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자신이 바라던 주공을 꿈에서 만나며, 말 그대로 꿈꾸며 살았던 그도 나이가 들어서는 꿈에서 주공을 볼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꿈조차 잃어버린 상황.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이상이 그저 이상에만 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공자가 보여준 길이었다.
선생先生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먼저 살아간 사람’사람이라는 뜻이다. 《논어》에는 이와 짝이 되는 후생에 대해 후생가외後生可畏라 말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다만 대체로 선생이란 후생의 성장을 지켜볼 여력이 없다. 자신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차니. 게다가 선생이란 그저 앞에 있다는 이유로 모든 면에서 후생後生에게 보여질 수 밖에 없다.
《논어》는 공자가 선생이었음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의 언행이 아주 자세히 기록되었으니 말이다. 공자의 말, 이리하라 저리하라는 가르침은 그렇다치더라도 공자의 행적에 대해 왜 이리 자세히 기록해두었을까? 그것은 선생이란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며, 그 삶의 형식과 태도 자체로 무엇인가를 전달하기에 그렇다. 그들은 공자의 행적을 통해 성인의 길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선생과의 관계는 삶에 대한 기억으로 남는다. 개인적으로 대학원까지 약 20년 동안 학교에 몸을 담았지만 선생들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묻는다면 그 지식의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과목, 개념,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대학 시절 한 선생은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교수라 부르지 마라. 교수는 직업을 말한다. 나는 선생이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래서 동문들은 선생이라 부르지 결코 교수라 부르지 않는다. ‘님’자를 붙이냐 안 붙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설사 누군가 ‘교수님’이라 칭하더라도 그 관계의 깊이가 얕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대학 교수의 수업을 들었고, 누군가는 선생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가 가르쳤던 과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 배운 지식은 훌쩍 날아가버렸나보다. 다만 그가 매 수업 꼼꼼하게 판서를 했던 것, 그리고 끊임없이 책을 읽도록 독려하고 글을 쓰도록 채찍질 했던 것은 기억난다. 몇몇의 수업 덕분에 글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가 쓴 책을 읽고는 학자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논어》를 공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논어》를 한 글자도 배우지 않았지만.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 있다.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뚝뚝하게 자기만의 산을 쌓고 있는 사람을 보면 덩달아 산을 쌓아올릴 힘을 얻게 된다.
 

3. 보론: 향당 – 군자의 몸가짐

10편 향당은 다루기 힘들다. 공자의 행동거지, 옷차림, 식습관 등을 이야기했지만 대체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혹자는 이 부분이 《논어》의 여러편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제 《논어》가 완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군자가 갖춰야 하는 행동거지를 공자를 빌려 정리해두었다는 것이다. 다른 편에 비해 지나치게 세세한 까닭에 비교적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향당을 읽으면 공자의 삶이 지나치게 딱딱하고 호화스러웠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옷은 어찌 저리 차려입었으며 식사는 어찌 저리 까다로웠을까. 공자의 실제 삶이 어땠는지는 증명할 방법이 없다. 다만 저런 삶이 공자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만 남겨두자. 어쩌면 귀족적으로 보이는 저 세세한 옷가지들과 식습관을 정말 공자가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거봐 고지식한 공자님이 그렇겠지’하며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른바 저런 귀족적 풍모가 늘 고지식함과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짚어두자.
삶의 태도, 삶의 양식은 대체 어디에서 나올까? 그것은 의식주라는 구체적인 일상의 국면에서 표현되기 마련이다. 각자의 삶의 형편에 맞춰 의식주가 갖춰져야 하는 것도 맞지만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 오늘날의 시선을 지나치게 투영하지는 말자. 귀족적 요소란 진지하게 삶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언뜻언뜻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가꿀줄 아는 사람이 자신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라고 보는 것은 어떨까?
내 아는 선생은 만년필과 연필을 쓴다. 볼펜을 쓰면 편할텐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공부에 있어 편리란 지독히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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