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3 – 장자와 노자

장자와 노자 :: 삶을 가꾸는 정반대의 길, 
 천장지구天長地久와 포정해우庖丁解牛

도道를 아십니까?

거리에서 한번은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를 아십니까’라며 말을 거는 상대를. 이와 유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 가운데 도를 아냐는 질문이 회자되는 까닭은 그 질문이 가지는 모호함 때문이겠다.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편 이것은 ‘도’라는 말이 가지는 본질적인 속성이 대답보다는 질문에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자》의 말을 보자.

無始曰:「道不可聞,聞而非也;道不可見,見而非也;道不可言,言而非也。知形形之不形乎?道不當名。」無始曰:「有問道而應之者,不知道也。雖問道者,亦未聞道。道無問,問無應。無問問之,是問窮也;無應應之,是無內也。以無內待問窮,若是者,外不觀乎宇宙,內不知乎太初,是以不過乎崑崙,不遊乎太虛。」
‘도란 (귀로) 들을 수가 없는 것, 들었다면 (도가) 아니오. 도는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 보였다면 (도가) 아니오. 도는 말할 수가 없는 것, 말했다면 (도가) 아니오. 만물에 형체를 베풀어 주면서도 그 스스로는 형체가 없음을 안다면 그 도는 의당 뭐라 이름 붙이지 못하게 되오.’ 무시無始가 (계속해서) 말했다. ‘도를 물었을 때 이에 대답한 자는 도를 모르오. 도를 묻는 자도 역시 아직 도를 듣지 못했소. 도는 물을 수가 없고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소. 물을 수가 없는데 묻는다면 없는 것을 물음이오, 대답할 수 없는데 대답하는 짓은 마음에 (참된) 도가 없는 거요. (참된) 도를 얻지 못한 채 대답할 수도 물을 수도 없는 것을 응대하는 자가 있다면 이와 같은 자는 밖으로는 우주 자연(의 오묘함)을 보지 못하고 안으로는 태초(의 현묘玄妙한 이치)를 알지 못하오. 그래서 높고 먼 경지에 이르지 못하며 절대의 (자유로운) 세계에 노닐지 못하오.’
– 〈지북유〉, 《장자》, 안동림 역. 552쪽

그렇다. 도를 묻는 사람은 무시해야 하는 게 맞다. 그는 도를 알지 못하므로. 도란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언어와 지각을 넘어선 절대적 세계에 도가 있다. 도란 이처럼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구체적인 형체로 도무지 잡히지 않는 것. 그래서 《주역:계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도란 구체적인 사물(器)이 아니다. 따라서 명시적인 언어로 표기될 수 없다. 한자漢字가 단지 추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한자는 본디 천지만물의 형체를 본따 만들었다. 글자는 곧 어떤 사물의 형태(形)를 드러낸다. 따라서 형체가 없는 것이란(不形, 形而上者) 이 문자로 도무지 표기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저 유명한 《노자》의 말은 이러한 관점을 대표하는 말이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역, 21쪽

참고로 이 《노자》의 첫 구절은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었다. 똑같은 문장을 구두점을 다르게찍어 표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최진석은 노자의 도를 유/무 개념을 포괄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개념으로 본다. 이와는 반대로 유/무의 대립적인 세계관 위에서 무를 표현하는 말로 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유라는 세계가 무로부터 생겨나왔다는 입장이 전제되어있다.(40: 天下萬物生於有,有生於無。) 반대로 최진석은 무로부터 유가 나온 것이 아니라 유무는 서로 대립적인 동시에 떼어낼 수 없는 개념이라고 본다. 그래서 40장의 생生을 ‘생겨나왔다’고 풀지 않고 ‘산다’고 푼다.

그러나 이처럼 ‘도’가 순수한 사변적 개념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논어》에서 공자는 ‘朝聞道夕死可矣’라고 했다. 이를 위의 맥락에서 해석하면, 알 수 없는 신묘한 도라는 개념을 알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논어》에서 ‘도’란 ‘邦有道’, 즉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상황을 의미하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공자가 듣고 싶은 ‘도’란 바로 그런 바른 정치적 이상이 펼쳐지는 모습일 것이다. 《맹자》에서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즉 통치의 방법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도’라는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많이 사용했던 사람은 송대의 성리학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도학자道學者’라고 일컬으며 ‘도’에 관해 다양한 논의를 펼쳤다. 이때의 ‘도’란 천도天道, 즉 우주적 법칙을 의미했다. 이것은 자연적 법칙을 의미하는 동시에 윤리적 가치를 가리키기는 말이었다. 그들은 이를 아울러 천리天理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천리를 아는 것이 바로 도학, 다르게 말하면 학문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제 ‘도’란 더 이상 알 수 없는 무엇이 아니라 알아야 하며, 그 앎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고 윤리적 준칙을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위에 상술한 것과 같이 ‘도’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대체 어떤 도를 말하는 거냐고. 마찬가지로 《장자》나 《노자》에서 ‘도’를 읽을 때에도 비슷한 태도가 필요하다. 도에 관한 내용을 듣는 것 이전에, 과연 어떤 도에 대한 말인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장자》와 《노자》 사이에 필요한 것은 《장자》와 《노자》에서 말하는 ‘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도가道家를 노장학老莊學이라 부른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노자와 장자 이야기를 하며 알아볼 것은 노자와 장자를 통해 그려지는 도가의 총체적 모습이라기 보다는 이 둘의 커다란 차이이다. ‘같은 도가인데 이렇게 다르다니’라는 감탄대신 이 둘을 ‘도가’라는 이름으로 묶는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둘은 공자와 장자, 맹자와 장자의 거리보다 더 멀다.

노자의 신화, 권력의 기술

제자백가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보려면 《사기》를 보아야만 한다. 비록 춘추전국시대가 이미 지난 전한前漢의 문헌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제자백가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사마천이라는 인물의 시각이 개관적인 시각도 아닐 뿐더러, 그와 제자백가 사이에는 적어도 수백년의 시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노자한비》 열전에서 노자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은둔하려 하시니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써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자는 《도덕경》 상, 하편을 지어 ‘도道’와 ‘덕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나갔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노래자老萊子도 초나라 사람으로 책 열다섯권을 지어 도가의 쓰임을 말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도를 닦아 양생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죽은지 129년 되던 해 사서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이 진나라 헌공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처음에 주나라와 합쳤다가 500년이 지나면 나뉘고, 나뉜 날로부터 칠십 년이 지나면 패왕이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였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인데, 위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을 봉토로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궁宮이며, 궁의 현손은 가假인데 가는 한나라 효문제를 섬겼다.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 앙의 태부가 되어 제나라를 다스렸다. 
… (이하 생략)
–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 81~83쪽

노자에 관한 설명이 매우 복잡하다. 이 기록만 보아서는 대체 노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러 이름이 뒤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1)이이李耳라 불리는 노나라의 사관 2)노래자老萊子라는 초나라 사람 3)주나라 태사太史 담儋, 적어도 세 사람이 노자의 후보다. 한편 비현실적 이야기도 있다. 160살 혹은 200여 살을 살았다는 기록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기》에 나와있는 인물치고 이런 신화적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마천이 당대의 다양한 기록들을 취합하여 노자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데 끌어썼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누가 노자인지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노자에 관한 이야기가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노자라는 인물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노자에 관한 사마천의 기록을 역사적 기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로 보아야 하며 여기에 드러난 상징, 혹은 표현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노자》 혹은 《도덕경》이라 불리는 책에 대해 사마천은 쇠락하는 주나라를 떠나며 지은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함곡관을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함곡관 너머에는 이후 천하를 통일하는 진秦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향후 패왕이 등장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노자》에 대한 인식, 무위자연이라는 가치를 재고하게 만든다. 김시천에 따르면 《노자》는 특정한 통치술을 전하는 책으로 그 독자는 천하의 패권을 쥔 권력자, 호모 임페리알리스(homo imperialis)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저자가 감추어진 《노자》라는 텍스트가 누구를 독자로 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자》도 저자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지만, 《노자》의 경우에는 아예 노자라는 인물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쉽게 말해 표지를 떼어놓고 본다면 《노자》에서는 그 어떤 인물도 만날 수 없다. 다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으며 이 교훈 가운데 성인聖人이나 후왕侯王과 같은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37장의 경우 이렇다.

道常無為而無不為。侯王若能守之,萬物將自化。化而欲作,吾將鎮之以無名之樸。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통치자가 만일 그 이치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교화하려 하거나 의욕이 일어나면 나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순박함으로 그것을 누를 것이다.
– 같은 책. 299쪽

여기서 후왕은 ‘無為而無不為’라는 도의 법칙을 지키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無為而無不為’란 무엇일까. 최진석은 이를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라고 풀이했는데, 이를 이렇게 옮겨보자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일도 없다.’ 다르게 말하면 마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 못하는 일 없이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낸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다. 어떠한 일을 도모할 때엔 그 직접적인 행동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不出戶知天下;不闚牖見天道。其出彌遠,其知彌少。是以聖人不行而知,不見而名(明),不為而成。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나간 것이 점점 멀어질 수록 아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 같은 책. 365쪽

‘不為而成。’, 하는 일 없이 어떤 성과를 이루어낸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천하를 알아야하며, 천도를 보아야 한다. 권력자는 문을 나서지 않고도, 창문을 열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천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권력자가 문을 나서는 순간, 창을 열어 직접 보는 순간 아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고 경고한다.

이는 일종의 정보 독점, 정보의 비대칭을 의미한다. 권력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고도, 특정한 행위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그것은 이미 권력의 비대칭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권력을 작동시키는 기술, 바로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도’의 참 모습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말할 수 없는 도’란 사변적 차원의 것이 아닌, 권력이 작동하는 비밀스런 방법을 가리키는 은유로 풀어야 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방법이란 권력을 유지하고 다루는 지혜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권력이 작동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강신주는 이를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교환의 논리’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 교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때의 교환은 동일한 것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교환 가능한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교환의 결과 이 차이는 잉여가치를 낳는다. 교환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 모습이고, 따라서 이때의 교환이란 사실 드러나지 않는 수탈이다. 국가 권력의 교환도 마찬가지이다.

將欲歙之,必固張之;將欲弱之,必固強之;將欲廢之,必固興之;將欲奪之,必固與之。是謂微明。柔弱勝剛強。魚不可脫於淵,國之利器不可以示人。
장차 접고 싶으면 먼저 펴 주어야 한다. 장차 약화시키고 싶으면 먼저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장차 폐지하고 싶으면 먼저 잘 되게 해 주어야 한다. 장차 뺏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명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물을 떠나면 안 되고,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 같은 책. 293쪽

빼앗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권력의 기술(道)이다. 이때 백성은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빼앗긴 것이다. 미명微明, 드러나지 않는 지혜라는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만약 무력을 통해 빼앗으려한다면 어떨까. 처음엔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반복될 수록 거센 저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면?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하루 아침이다.

民不畏死,奈何以死懼之?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찌 죽인다는 것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 같은 책. 511쪽

따라서 《노자》에서 말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권력을 작동시키는 기술을 의미한다. 이럴 때에 권력은 원하는 바를 모두 손에 쥘 수가 있다. 道常無為而無不為

권력의 욕망, 양생술의 비법

《노자》의 성립 연대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사마천의 전승을 따르는 사람의 경우 《노자》가 춘추시대의 저작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때 《노자》는 《논어》보다 앞선 텍스트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상술한 통치술로 《노자》를 해석하는 경우 훨씬 후대로 잡는다. 전국시대 말부터, 한대 초기까지 잡기도 한다. 그것은 진秦이라는 제국의 탄생을 좌우하여 이런 통치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생산되었으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의 시황제에 대한 평가는 양 극단으로 갈린다. 폭군의 대명사로 보는 입장이 있는가하면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의 모델로 보기도 한다. 어쨌건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으며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처음 만든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역사 이래로 유래없는 업적을 세웠음을 자부하며 새로운 칭호를 만들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이에 신하들이 올린 칭호는 태황泰皇이었으나 성에 차지 않아 고대의 성인, 삼황오제 가운데 한 글자씩을 취하여 황제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역사의 평가를 따라 시호를 받을수 없다며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다. 시호 따위를 없애고 순서에 따라 시황제 다음엔 이세황제, 이어서 만세까지 가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시황제는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 스스로를 부르는 말로 짐朕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이 ‘짐’에는 본디 ‘조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어떤 사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제를 짐이라 불렀다는 것은 황제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 황제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작동해야 한다. 《노자》의 말을 기억하자.

진시황은 불노불사를 추구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진시황 이전에 불노불사를 추구한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늙음과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음과 죽음을 넘어 영원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최초의 황제인 그가 불노불사를 추구한 최초의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절대권력의 속성이 그런 영원한 지속을 바란다는 상징이 아닐까? 거꾸로 말하면 진시황이 불노불사를 추구한 것은 자기 개인의 생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로 대표되는 자신의 제국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제국을 바라는 그의 욕망을 보여주듯, 그의 무덤에는 천하의 모습이 그대로 옮겨졌다고 한다.

권력은 영속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한무제가 신선술에 푹빠져 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과 무제 사이에는 몇 명의 황제가 있긴 하지만 무제야 말로 진시황에 견줄 수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더불어 그는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황제 가운데 한명이기도 하다.

무제 이후 신선술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지는데, 신선이란 건강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수련이 필요한데, 이를 양생養生술이라 불렀다. 양생이란 ‘생명’을 가꾸는 기술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죽음을 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오해, 신선술 – 도가적 수련이란 자연을 따르는 것이라는 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신선술이란 생장소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정확히 반대로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특정한 약을 섭취하거나(연단술), 특정한 방법으로 신체를 훈련하는 방법(방중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여기에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커다란 흐름을 이루는 데 후대의 도교라는 게 바로 이것이다. 도교가 매우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신비적 요소가 결합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노자》는 이런 양생술의 텍스트로 여겨지기도 했다. 앞서 사마천이 노자를 설명하면서 그가 수백살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언급한 점을 기억하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노자가 ‘老’라는 호칭을 얻은 것은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70먹은 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이런 노자에 얽힌 설화 이외에도 《노자》 안에서 위와 같은 영속적 욕망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外其身而身存。非以其無私耶?故能成其私。
천지 자연은 장구하다. 천지 자연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생할 수 있다.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앞서게 된다. 그 자신을 도외시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능히 그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 같은 책. 75쪽.

《노자》에서 말하는 신비란 이렇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방법과 다른 길이 필요하다. 자신을 도외시하는 것이 자신을 보존하는 길이며, 사적인 자신의 모습을 버리는 것이 사적인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이 된다.

한편 《노자》 등을 번역하는 데 흔히 사용된 ‘자연’이라는 표현은 주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원문을 보면 ‘자연’이란 ‘天’을 가리킨다. 이런 번역의 문제는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노자》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곳에서는 道를 자연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知常容,容乃公,公乃王,王乃天,天乃道,道乃久,沒身不殆。
늘 그러한 이치를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할 줄 알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왕 노릇을 하는 일은 곧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며, 하늘에 부합하는 일이 곧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오래 갈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 같은 책. 145쪽

吾不知其名,字之曰道,強為之名曰大。大曰逝,逝曰遠,遠曰反。故道大,天大,地大,王亦大。域中有四大,而王居其一焉。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억지로 글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고 말할 뿐이다. 큰 것은 가게 되고 가면 멀어지며 멀어지면 되돌아 온다.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은 크고, 땅은 크고, 왕도 또한 크다. 이 세상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이 그 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은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 같은 책. 215쪽

두번째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지-도-왕’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크고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이때의 ‘자연’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 법칙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 문명-인간과 반대되는 개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太上,下知有之;其次,親而譽之;其次,畏之;其次,侮之。信不足焉,有不信焉。悠兮,其貴言。功成事遂,百姓皆謂我自然。
최고의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 그 다음은 친밀함을 느끼고 그를 찬미한다.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그를 비웃는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도 통치자를 믿지 못한다. 조심스럽구나! 그 말을 아낌이여.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마무리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는 원래부터 이랬어!’라고 하는구나.
– 같은 책. 157쪽

여기서 ‘信不足’을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라고 풀이했지만, ‘신뢰가 부족하므로’라고 옮기는 것이 낫다. 즉, 권력을 쥔 통치자가 모습을 드러낼 수록 신뢰가 부족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통치자는 무위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던가, 사사로운 방법으로 일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조심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자연’이라 말한다.

‘자연’은 본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然’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자연을 특정한 개념이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그러한’, ‘저절로 그러한’ 상태를 가리킨다. 《노자》의 가르침을 따라 통치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백성들은 스스로 체제의 일부가 되어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작동. 바로 이렇게 해야만, 하늘과 땅이 그렇듯 권력은 영속적으로 영위될 수 있다. 天長地久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결국 《노자》에서 말하는 양생이란 삶과 권력을 영속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며, 결국 이는 자연적 법칙을 거스르는 것인 동시에 또 다른 ‘자연’ –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자의 양생, 틈을 노려라!

흥미롭게도 《장자》에도 ‘양생’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바로 〈양생주〉 라는 부분이다. 양생주는 이렇게 시작한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殆已 已而為知者 殆而已矣
우리의 삶(生)에는 끝이 있지만 앎(知)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알려고 한다면 더욱 위태로울 뿐이다.
– 같은 책. 91쪽

시작부터 인상깊다. 장자의 양생은 ‘吾生也有涯’, 즉 우리 삶이 유한한 삶임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따라서 이것은 노자식의 영속성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길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유한한 생명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 장자의 고민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노자》가 절대 권력자를 위해 쓰였다면 《장자》는 그와는 다른 시선에서 쓰였다는 점이다. 《노자》가 권력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반면 《장자》는 권력의 바깥에서 이 권력에 반대하고 도전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때의 유한한 삶을 가진 인간이란 권력 바깥에서, 권력의 폭력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러나 앎이란 무한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유한한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무한한 앎을 추구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장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좇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게 소진하는 것이므로. 그의 시선은 유한한 존재에 묶여 있다. 그렇다고 그가 제한적인 세계에 갇힌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자.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장자는 또 다른 깨달음(知)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어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또 다른 깨달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역할은 무엇일까. 장자가 추구하는 삶의 윤리란 무엇일까.

為善无近名 為惡无近刑 緣督以為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착한 일을 하면 소문이 나지 않게 하고,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한다. (그러니까 선악에 얽매이지 않는) 중간의 입장을 따라 그것을 기준(常道)으로 삼는다면, 몸을 온전히 지킬 수 있고 평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으며, 부모를 공양하고 천수天壽를 다할 수가 있다.

이어지는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이를 적당히 살라는 뜻으로 생각하지 말자.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이란 소문이 퍼지지 않는 길, 형벌에 저촉되어 목숨을 잃지 않는 길이다. 몸을 온전히 지키고, 주어진 수명을 다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를 앞에서 이야기했던 장생불사의 의미로 오해하지 말자. 어차피 삶은 유한하다. 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도출된다. 장자의 말은 이렇다. 유한한 생명을 가능한 충실하게 살아가는 법. 그러나 이 길은 통상적인 방법과는 다르다. 흔히 말하는 입신양명의 성공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어서 포정의 고사가 등장한다.

庖丁為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譆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포정庖丁
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다.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서걱서걱, 빠극빠극 소리를 내고, 칼이 움직이는 대로 싹둑싹둑 울렸다. 그 소리는 모두 음률에 맞고, (은殷 나라 탕왕湯王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도 조화되며, 또 (요堯 임금 때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절에도 맞았다. 문혜군은 (그것을 보고 아주 감탄하며)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손끝의)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한 것입죠.’

포정庖丁이란 백정을 가리킨다. 장자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통상적인 관점을 무너뜨린다. 백정이 문혜군이라는 군주와 대화를 나눈다. 문혜군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정과 군주의 대화라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권력의 비대칭성 위에 장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싣는다. 권력의 비대칭을 그는 뒤집어 놓는다. 하찮은 백정이 들려주는 지혜로운 이야기.여기에 장자의 참 매력이 있다.

포정의 재주는 대단하다. 그의 화려한 움직임은 군주의 눈에 들 정도였다. 그래서 문혜군은 그의 뛰어난 기술(技)에 관해 묻는다. 그러나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道’의 문제이다.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제 백정이 군주에게 도에 관해 가르침을 전해준다.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无厚 以无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은 눈에 안 띄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천리天理를 따라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 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날의 실수로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죠. 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무리하게) 뼈를 자르니까 그렇습죠.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죠.

처음 소를 잡을 때 보이던 것은 오직 소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의 부분이 보이는 것은 물론 소를 자유자재로 해체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오죽하면 19년 동안 칼을 썼지만 숫돌에 막 간 것처럼 새 것일 수 있을까. 이러한 포정의 말을 들은 문혜군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말한다. ‘善哉!吾聞庖丁之言,得養生焉。’ 포정의 말에서 우리는 양생의 비밀을 발견해야 한다.

19년간 썼지만 상하지 않은 칼, 이때 칼은 바로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 칼을 어떻게 놀리냐에 따라 칼의 수명은 달라진다. 한 달을 쓰기도 하고 한 해를 쓰기도 한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틈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차이이다. 포정의 능력은 틈을 볼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는 틈을 따라 칼날을 놀렸다. 근육과 뼈 사이의 틈. 이때의 근육과 뼈는 유한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여러 장애물들이다. 이를 피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틈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어 눈으로 보는 것을 멈춰야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감각 기관을 의지하지 않을 때 이 틈을 알 수 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해지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데 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을까. 보이지도 않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이며, 들어보지 않은 길을 어떻게 갈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길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포정의 비유가, 앞서 소개한 바퀴 깎는 노인의 고사가 그렇듯 이러한 경험은 실재적이다. 언어화할 수 없다고 하여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포정은 자신이 발견한 틈이 어디인지 손으로 짚어 가리킬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아니, 포정이 여기라고 보여주고, 설명해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포정은 그 틈으로 칼날을 노닐며 살과 뼈를 베어낸다. 그 틈은 지각되지 않지만 실재적이다. 이 비밀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직접 경험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이 쉬운 것은 아니다. 포정에게도 19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누군가의 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이 전수될 수 있다면 단번에 그 길을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전해질 수 없다. 아니, 전해주어도 받을 수 없다. 夫道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직접 해봐야만 한다. 경험의 장에서 직접 몸으로 겪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장자가 자신의 비유에서 다양한 숙련공들을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부딪혀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분명 다르다. 여기에 무엇인가 비밀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삶의 지혜라 부를 만한 것이다. 권력의 기술도 아니고, 어떤 이론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시간을 경험한다고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포정은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언제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른다. 끝을 알 수 없는 반복 끝에 어느 순간 도약을 경험할 뿐. 그런 의미에서 포정이 말하는 양생의 길은 투철한 삶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유한한 삶, 한정된 시간 속에서 다른 것을 경험하려면 온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양생주는 노담의 죽음으로 끝난다.

老聃死,秦失弔之,三號而出。弟子曰:「非夫子之友邪?」曰:「然。」「然則弔焉若此,可乎?」曰:「然。始也,吾以為其人也,而今非也。向吾入而弔焉,有老者哭之,如哭其子;少者哭之,如哭其母。彼其所以會之,必有不蘄言而言,不蘄哭而哭者。是遁天倍情,忘其所受,古者謂之遁天之刑。適來,夫子時也;適去,夫子順也。安時而處順,哀樂不能入也,古者謂是帝之縣解。」
노담이 죽었을 때 진일은 문상을 가서 (형식적인) 곡 세 번만 하고 나와 버렸다. 제자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그분은 선생의 벗이 아닙니까?’ (진일은) 대답했다. ‘그렇지.’ ‘그렇다면 그런 문상으로 괜찮을까요?’ ‘괜찮아. 처음 나는 그를 인물이라고 보았네만 지금은 달라. 아까 내가 들어가 문상을 할 때, 늙은이는 제 자식을 잃은 듯이 곡을 하고 있고, 젊은이는 제 어버이를 잃은 듯이 곡을 하고 있더군. 그가 사람들을 모은 원인 중에는 반드시 요구는 안 했더라도 슬픔을 말하고 곡을 하도록 은연중 시킨 바가 있기 때문이지. 이것은 (생사라는)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거역하고 하늘로부터 받은 본분을 잊음이야. 옛날 사람은 이것을 ‘하늘을 도피한 벌’이라고 했지. 그가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난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랐을 뿐이야. 때에 따라 편안히 머물러 자연의 도리에 따라간다면 슬픔 따위 감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걸세. 이런 경지를 옛날 사람은 ‘하늘의 묶어 매닮에서 풀림’이라고 불렀다네.’
– 같은 책. 98쪽

태어남과 죽음이야 말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죽음에는 슬픔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제 수명을 다누리지 못하고 죽는 죽음.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다. 죽음을 억지로 피하려는 것만큼 죽음을 재촉하는 것도 어리석다. 모두 유한한 생명을 충일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담, 노자는 삶과 죽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장자는 묻는다 운명에 묶인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운명에서 풀려난 존재가 될 것인가. 자유란 속박된 현실에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속박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속박 속에서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유한한 삶을 벗어나 무한한 삶을 누리는 것은 도리어 삶에 갇힌 것이다. 반대로 유한한 삶을 긍정하되 이 삶을 유한한 세계 안에서 충일하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양생이며 장자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길이다. 이는 어떠한 사태와 사태의 틈에 번뜩이며 등장하는 찰나의 길이다. 따라서 모두의 보편적인 길이 될 수는 없으며 영원하지도 않다. 당연히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속의 가치와도 거리가 있다. 부귀나 권력과 상관없는 것은 물론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권력의 꼭대기에 서려는 자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Top을 노리지 말고, 틈을 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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