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 체인지 – 독립연구자와 책방지기

몇 번이나 글을 쓰다 지웠습니다. 글이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물쭈물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그 뒤를 이은 ‘수유너머R’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다 수유너머R이 해체하면서 무적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나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수유너머R 시절의 인연과 함께 똑같은 자리에서 ‘연구공간 우리 실험자들’을 만들었고 그 살림을 함께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웃 건물에 자리를 얻어 ‘온지곤지’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실상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수유너머R’에서 하던 세미나는 같은 자리에서 이름만 바꿔 하고 있는 셈이고, 청소년 강좌를 따로 떼어 다른 살림을 차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소란스러운 사건을 겪으며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감정이 좀 무뎌질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더군요.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야 비로소 앙금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지러워진 마음도 문제지만 더 큰 고민은 저를 설명할 말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수유너머의 연구자’라는 정체성이 있었지만 이젠 그 이름으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게 무슨 문제인가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괴롭혔던 질문이 더 집요하게 파고드니, 허름한 간판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대체 나는 무슨 공부를 하고 있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나,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따위의 질문으로 새벽을 맞은 게 여러 날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얇은 방어막이 사라진 지금 이 질문들은 저를 물어뜯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스스로의 꼴을 보니 대단한 연구자가 되기도 글렀고, 학교와 담을 쌓고 지낸 시간이 길어 대학에서 강사는 물론 교수 자리를 꿈꾸지도 못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인문덕후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 그런가 하는 생각에 생계형 인문학자라는 이름을 붙여보기도 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먹고사니즘’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가엾은 삶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미워집니다.

그러다 ‘독립연구자’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그나마 반가운 이름이더군요. 대학과 자본에서 벗어난 연구자라는 뜻에서 ‘독립연구자’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독립’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꿩 대신 닭이라고 이 말을 한동안 써보려 합니다. 대단한 표현은 아닙니다. 아직도 ‘자립’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공부와 삶에서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독불장군으로 살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고립 연구자’는 되지 않으려 합니다.

‘온지곤지’라는 이름의 새 공간을 마련하면서도 생각이 많았습니다. 정말 맨손으로, 아니 마이너스를 안아 가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습니다. 휑한 공간을 보며 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궁리 끝에 ‘책방’을 해 볼까 생각합니다. 갑자기 든 건 아니고 연구실 일을 겪기 전부터 막연히 갖고 있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오래전부터 아내가 가지고 있던 꿈에 무임승차 해보려 합니다.

아내는 예전부터 작은 책방을 꾸리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네에 서점이 없기도 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어깨너머로 보니 저마다 제각기 색을 가지고 있는 작은 책방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휴가차 진주의 ‘진주문고’와 통영의 ‘봄날의 책방’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직접 가 보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기더군요. 책과 이야기를 만들고 사람을 만나는 일, 책방지기로서의 삶이 참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지는 못하고, 아마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엔 책방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소년과 인문학을 키워드로 한 책방을.

RPG 게임을 하면 게임의 주요 국면에서 케릭터의 성장을 위해 커다란 변화를 줘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를 클래스 체인지라고 합니다. 어떤 게임은 클래스를 바꾸면 lv 1에서 시작합니다. 익숙한 아이템도 다 버려야 하는 순간. 개인적으로 지금이 바로 그럴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뭐 이런 오덕스런..;;)

그 변화의 하나로 이번 19일에 해방촌장터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헌책도 팔고 책도 만들어 팔아보렵니다. 헌책은 집에 있는 묵은 책을 내놓기도 하겠지만, 선물을 받고 싶습니다. 보지 않는 책, 버리지 못하는 책이 있다면 선물로 주세요. 팔 수 있는 건 팔고, 나누어 읽을 수 있는 건 읽고. 버릴 수밖에 없는 책은 처리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선물 받고 여기서 시작하려 합니다.

연구자가 세상과 소통할 길은 말과 글밖에 없습니다. 그중에 글은 보통 논문이나 출판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나 논문은 쓰지도 않겠지만, 출판까지 할 여력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인물 마냥 썩어갈 수는 없는 법. 예전에 썼던 강의안과 발제문 가운데 일부를 갈무리하여 거친 형태의 책으로 만들어 팔려 합니다. 멋진 책은 아닐 테지만 중얼거림보다는 말 걸기가 낫지 않느냐는 생각에 도전해봅니다.

독립연구자와 책방지기, 책방지기와 독립연구자… 이게 잘하는 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뭐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용감하게 첫걸음을 떼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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