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현장을 구성하는 기술

2012년 5월 21일 R 잡담회(( 연구실 내부에서 발표한 글이지만 공개해도 무관할 거 같아 블로그에 올려둔다. 참고로 원문에 쓰였던 실명은 모두 OO으로 처리했다.))

 

0. 소외

5월 18일 금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피곤하다. 몇 시간이나 떠들었는데 공허한 허공에 말을 뱉어놓은 것 같다. 씨앗을 심듯, 그렇게 알찬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요원한 희망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해서는 나중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토끼전의 다른 주인공이 거북이 아니라 별주부라 불리는 자라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느라 진을 뺀 것이었다. 거북이가 아니라 ‘자라’라구!!!

역시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비단 이번 주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난주는 조금 나았지만 그 전 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두 주전, 역시나 허공에 내뱉듯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선생은 언제 소외되는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낯선 이방인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다. 친구들은 온 몸으로 따분함을 표현한다. 구부정한 어깨며, 책상에 미끄러지듯 기대어 앉은 꼴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친구까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며 그저 시간을 축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바람처럼 시간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이 끝나곤 아이들은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올 때는 그토록 드문드문 오더니, 돌아가는 길은 바람 같다. 텅 빈 공간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피곤하다.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공허하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대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수십 번도 더 던지고 있다.

배움의 공간에서 선생의 역할을 맡은 이가 소외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그것을 단지 무시당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위험하다. 만약 그렇다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권위와 위엄을 몸에 둘러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방패막이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 소외당한다는 것은 배움의 공간에서 배움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다르게 말하면 그 현장에서 배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1. 무능력

빈곤청소년((지역 아동센터에 있는 친구들이라고 모두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이 ‘빈곤’이라는 단어로 묶기에 충분한 ‘결여’ 속에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빈곤이 단지 ‘경제적 빈곤’, 즉 통상적으로 이야기되었던 입고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님을 염두해두자.))과 인문학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힘들겠지만 참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그런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거라고. 천만의 말씀. 그런 식의 ‘의미 있음’이 나에게 ‘의미 없음’이 된 지 오래다. ‘보람찬 봉사활동’으로 이 활동을 부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나는 내 삶의 일부를 ‘희생’해서 저들을 돕는 따듯한 손길이 된다.

사실 여기에는 일종의 ‘구원자의 비유’가 숨어있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무능한 자를 구해주는 그 도식. 이 배치에서 나는 지식의 전달을 요구받는다. 많이 공부했으니 그 많은 지식을 누군가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유식한 자는 무지한 자를 앎으로 이끈다. 마치 구원자가 길 잃은 양을 빛으로 인도하듯. 교육을 통해 삶이 바뀌리라고 말한다. 빈곤에서 무기력에서 그들을 건져낼 수 있다고 말이다.

‘인문고전’이라는 해괴한 말을 만들어낸 이지성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학습의지를 잃었던 아이들이 전국 저소득층 공부방 대상 학습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에게 논어의 ‘인(仁)과 예(禮)’를 얘기하며 왕따에서 리더로 변화했다”((<공자 왈~ 맹자 왈~ 아빠와 함께 고전 읽고 생각 나눠요>, 중앙일보 2012년 1월 25일))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고전을 통한 인문학을 배우면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리더가 된다는 말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학습의지가 없던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고, 덩달아 성적까지 높아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말한다. 인문고전을 읽으면 천재의 두뇌를 만들 수 있다고.

이런 척도에서 보자면 지난 5년간, 빈곤청소년과의 만남은 모두 허투루 돌아갈 일이다. 몇 년간 함께 공부한 친구들은 여전히 책보다 PC방을 더 사랑한다. 공부하자면 여전히 손사래를 치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성적이 좋아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천재의 두뇌를 닮았다고 할 만큼 지능이 높아졌다고 하기도 어렵다.

어떻게 보면 나를 피곤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몇 년을 함께 공부했지만 OO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OO는 여전히 만화책과 PC방에 빠져있다. OO이와 OO이는 여전히 경계성이라는 영역에 머물러 있고, OO나 OO는 여전히 책 읽기도 버거워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OO는 속옷 회사에 취직했다고 하고, 법대에 가고 싶다는 OO의 꿈은 여전히 이루기 힘들어 보인다. 지난 몇 년간의 수업은 이들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었을까?

정말 인문학이라는 것이, 고전을 읽는 다는 것이 ‘구원’에 비유할 만큼 전지전능한 것인가? 이지성이 말한 것처럼 보통 아이를 천재로 만들 수 있는 비법이 숨어 있는 것일까?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은 ‘희망’을 이야기할 만큼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냈기 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지식의 무능력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2. 배움

질문을 바꿔보자. 과연 그 현장에 선생으로 참여한 나는 어땠는가? 보람대신 기쁨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때 기쁨(說/悅)이란 공자가 말했듯 배움에 뒤따르는 것이다. 즉, 유의미한 변화를 통한 보람 대신 배움을 통한 기쁨이 있었다는 말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첫 수업에서였던가, OO는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손이 아파 못쓰겠어요.’ 공책을 봤더니 고작 한 글자를 써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 글자를 써놓고 불평이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OO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손이 아파 글을 쓸 수 없는 연약한 신체, OO는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연필을 쥐는 것조차 쉽지 않은 연약한 신체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에게 공부란 자신의 연약한 신체를 단련시켜 나가는 과정이었다. 손에 굳은살을 박아 넣는 과정.

OO는 늘 구부정한 아이였다. 구부정한 등을 펴려면 아프다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도통 알아보기 힘들도록 글씨가 엉망이었다. 매 수업시간 마다 등을 펴라는 말이 OO 귀에 꽂혔다. 제대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2~3번은 물론이거니와 많으면 5~6번까지 다시 쓰는 일도 있었다. 놀랍게도 반복할수록 나아졌다. 등을 펴고 바르게 앉는 것은 물론, 글씨도 정갈하게 바뀌었다. 반복이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OO이와 OO이는 이른바 ‘경계성’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다. 또래에 비해 이해하는 능력이 살짝 부족하다. OO와 OO는 또래에 비해 읽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공부한다고 해서 무슨 큰 불편함이 있지 않았다. 적어도 함께 읽고 쓰는 공부에서는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친구들이었다. 지능과 성실함은 무관하다.

OO이와 OO이 역시 일종의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다. 읽고 쓰는 데 있어서는 다른 친구들 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이 둘은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OO이는 교우관계에 있어서만은 꽤 뛰어나다. 사람들 사이의 힘의 배치를 파악하고 적당히 처신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OO이는 눈치가 빠르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어느 새 다시 나타나고는 한다. OO이가 사라지면 OO이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지능의 척도가 말하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중고등학생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었다. 끝나는 시간까지 로미오는 남자 주인공이며, 줄리엣은 여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했다. 그것도 한 달 내내. 텍스트를 읽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이들은 삶 자체가 분절이다. 기억하기 보다는 반응하기. 이 때문에 이들은 순식간에 말을 잡아채는 능력을 갖고 있다. 시를 지어보면 아는데, 익숙한 낡은 언어 대신 자신을 표현하는 다른 말을 발굴해내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글에선 삶이 묻어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다. 말은 관념을 형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연장이다.

 

3. 스승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유식한 자가 무지한 자를 일깨우는 그 낡은 방법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스승의 행위란 곧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식한 자가 자신의 지식을 무지한 자에게 쉽게 설명해 주는 것, 이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설명자, 유식한 스승은 결코 무지한 자를 유식하게 만들 수 없다고. 그것이야 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도리어 그는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며 설명자 대신 무지한 스승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떠오르는 자연스런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스승은 대체 왜 필요하다는 것인가? 모든 지능이 평등하다면 누가 누구에게 배우는 일이 없어야 할 것 아닌가?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스승은 질문한다. 그는 말을 명령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던 또는 스스로를 단념하던 지능의 발현을 명령한다. 그는 이 지능이 하는 일이 주의 깊게 이루어지는지, 이 말이 강제를 피하기 위해 아무거나 되는 대로 말하지는 않는지 검증한다.’((<무지한 스승> 64쪽.))

다르게 말하면 스승이란 ‘강제하는 자’이자 ‘검증하는 자’이다. 스승이 보는 것은 주의 깊은지, 즉 성실함의 문제이다. 다르게 말하면 스승이란 성실하도록 강제하는 자이며, 성실함을 추동하는 자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욕구와 의지의 문제로 풀이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서 지능은 쉰다. 더 강한 어떤 의지가 그의 소리를 들리게 만들고 계속하라고 말하지 않는 한 말이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아라. 그리고 모든 것에 동일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너 자신이 너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면서 네가 이미 쓴 동일한 지능을 적용한다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아라.’((<무지한 스승> 104쪽.))

말을 바꿔야 한다. 지식, 앎, 교육이라는 말 대신 배움이라는 말로. 지난 몇 년간의 활동이 무엇을 가르쳤는가, 무엇을 알려주었는가, 어떤 지식을 전해 주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말하기 힘들다. 도리어 가르침은 실패하고, 알려주는 것은 까먹기 일쑤다. 참여한 선생, 나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라고 묻지 않고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참여한 그 친구들에게도 무엇을 알았는가, 어떤 지식을 얻었는가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처럼 이 배움에는 적지 않는 노고가 필요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가 말한 무지한 스승이란 곧 지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의지를 강제하는 자’이다. 학생이 자신의 의지를 쉼 없이 발현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검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쉼 없이 반복해서 읽게 하고, 쓰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큰 목소리로 읽으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롯이 자신의 신체를 써서 텍스트를 만날 때 배움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 배움의 현장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선생의 역할은 학생들이 자신의 힘으로 텍스트를 만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의지를 강제하는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 담론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이 ‘의지를 강제하는 기술’을 무시해버리는 데 있다. 즐거운 교실, 행복한 배움 등등은 학생이 자발적으로 배움의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것은 시작점만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 욕구가 발심發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맞겠지만 항심恒心 마저 그 욕구가 책임지는 경우는 드물다.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욕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 아니던가. 물론 이 의지를 키워가는 기술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근기根氣, 뿌리 기운을 길러가는 일이다. 전통적인 공부법이 근기를 키우는 데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청소년으로 돌아오면,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의지보다 욕구가 앞선다. 욕구는 엄청나게 큰데 의지는 보잘 것 없이 작다. 청소년의 다양한 문제들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대부분 배움을 욕구의 차원에서만 논의할 뿐이다. 학생의 의무, 성실함과 꾸준함은 그렇게 간과된다.

처음 이야기했던 문제로 돌아가자. 소외감을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배움의 현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던 걸까? 설명자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말의 성찬으로 그들의 귀를 채우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의지를 강제하기 보다는 욕구를 촉발하려 했기 때문에. 함께 배움의 현장을 만들어가려 하기 보다는 선생은 가르치려하며, 학생은 듣고 보려고만 했기에.

 

4. 보론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사라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체념했다. 자코토는 아이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 뒤에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 물론 히브리어는 그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재능을 더 타고났고, 더 지도받은 지능들이 영원이 알지 못할 것 – 그것은 히브리어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 을 알게 된 것 말고는’((<무지한 스승> 40쪽.))

사람들은 기능적인 지식을 주문한다. 무엇을 위한 목적을 설정하려 드는 것이다. 굳이 그것이 대학진학이나 높은 연봉의 좋은 일자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며 특정한 기능적인 역할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다른 곳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며 자신을 위한 배움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가장 크게 경계할 것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남의 척도에 좌우되는 배움이다.

그러나 이때의 자기(己)란 특정한 기능에 국한되지 않는, 남의 척도에 휘둘리지 않는 건강한 자아를 말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라는 아상我相에 치우친 것도 아니다. 두 발을 이 땅 위에 딛고 있는 한 어찌되었건 현실의 문제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일 테니.

또 다른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현재의 현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떤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성태숙 선생님과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중산층의 가치를 전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자신의 계급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삶의 현주소를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계급적 토대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반대로 무엇을 할 수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의사를 꿈꾸고 판검사를 꿈꾸는 고등학생이 있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천연스럽게 ‘그래 넌 할 수 있어!’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희망 고문’이 아닐까?

‘도시 빈곤지역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엉뚱한 생각이 슬며시 들곤 한다.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현재의 빈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단순히 소득이나 삶의 질이 양극화되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인류 종 자체가 서로 간에 넘어설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갖는 분화의 방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나친 말 같지만 소위 상위 1%에 속하는 가정의 자녀들과 빈곤 가정의 자녀들이 자라는 갖가지 모습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정말 서로를 같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극심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배고픈 아이들이 가짜 음식에 취해있다 / 성태숙>, 한겨례 2012년 3월 29일))

인용한 글은 본래 먹거리 문제에 관한 글이지만 배움의 영역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똑같이 작동한다. 초등학생부터 다양한 학원은 물론이거니와 방학 마다 해외 연수를 떠나는 아이들과 빈곤청소년들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앞의 이야기를 빌리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도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원서로 읽는 것은 물론 영화와 뮤지컬로 본 친구들이 있다.

이 ‘질적인 차이’ 속에서 어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회피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배움을 자신의 삶에만 머무르게 만드는 게 아닌가. 적어도 ‘삶을 바꾸는 공부’라고 한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 배움의 현장을 구성한다고 했을 때 그 배움의 현장은 어떤 삶을 그려야 하는 것일까? 계급의 문제를, 현재 당면한 절멸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앎의 의지를 강제하는 배움의 현장 – 전통적인 말을 빌리면 서당 –을 지금까지 만들었다면 이제는 당면한 절멸의 문제를 고민하는 새로운 공간 – 결국 만든 말은 ‘계급의 학교’란 말인데… -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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