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묶고 나서라 (욥기 38-42)

드디어 ‘욥기 읽기’의 마지막이다. 서늘한 추위를 느끼면서 《욥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여름이 고개를 내어밀고 있다. 꾸준히 읽었으면 벌써 끝났을테지만, 꾸물거리는 탓에 늦었다. 6월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생각에 숙제처럼 묵혀두고 있던 것을 꺼내어 정리해본다.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38:1-3)

단연 《욥기》의 백미라고 할만한 부분이다. 폭풍속에서 야훼가 등장한다. 갑작스러운 등장. 1~2장에서 등장했던  야훼가 이번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폭풍과 같는 강렬함이 이 속에 깃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지만,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것 뿐이다. 야훼의 등장 조차도 두렵거든 야훼의 폭풍같은 질문에 대답할 것을 요구 받는다. 물론 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다만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당당함, 용기, 집요함…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는 태도.

이번에 읽으면서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이 누구에게 향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앞의 구절,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는 부분 때문에 욥이야 말로, 욥의 불평이야 말로 야훼의 뜻을 가리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욥의 여러 불평들, 그의 처절한 부르짖음까지도 부정해야 할지 모른다.

《욥기》는 구약성서 가운데 특이하게도 말들로 가득차 있다. 욥과 친구들의 말로 가득찬 이 텍스트에서 대체 ‘부질없는 말’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야훼의 뜻을 담아내지 못했다. 과연 사탄과 야훼의 내기에서 시작된 이 ‘원인 없는 고통’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미루자. ‘부질없는 말’, 《욥기》에 가득찬 말 가운에 어떤 것은, 혹은 그 전체는 야훼의 뜻을, 38장 이하에서 다루는 주제와 어긋나는 것임은 분명하다.

만약 야훼의 말이 욥과 그의 친구 모두를 향한 것이라면, ‘허리를 묶고 나서라’는 주문 역시 모두에게 향하는 것이다. 욥과 세 친구, 엘리후까지. 이 다섯의 논쟁 가운데 누군가 끼어든다. 그것도 전혀 상관 없는 주제로. 그는 묻고자한다. 대체 너희가 얼마나 지혜롭단 말이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38:4)

야훼가 묻는 것들이란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유한한 존재, 필멸의 존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이야 신적인 영역의 베일을 과학이 일부 벗겨버렸지만 과거 《욥기》가 쓰여졌던 상황에서 야훼가 던지는 질문들은 모두 신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이 폭력적인 무한자의 등장 앞에 인간은 그저 멍하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욥기》의 야훼는 이렇게 무한함으로 쏟아져내린다. 저 고통 받는 가련한 인간에게 쏟아지는 어마무시한 존재의 등장.

이러한 거대함 때문인지 38장 이하에 서술된 야훼의 모습은 마치 《창세기》의 야훼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는 명령하는 존재다. 아주 단편적인 구분일지 모르겠으나 《신명기》에 나온 야훼의 모습이 ‘약속하는 자’라면 《욥기》의 야훼는 명령한다. 물론 이 명령은 어떤 계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주적 명령이다.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 그어놓고 문에 빗장을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나는 명령내렸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38:10-12)

야훼, 절대자가 인간과 다른 것은 그가 무한한 시간의 존재라는 점이며, 인간의 개체적 유한성을 넘어 우주적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다면 이렇게 명령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이란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묶인 존재이며, 명령하지 못하는 존재다. 따라서 예수가 다른 존재들에게 금지를 명령하여 때로는 내어쫒았을 때, 그는 인간인 동시에 신일 수 있었다. 과연 욥의 저 불평하는 입은 자신의 병을 향하여 ‘나를 떠나라’라고 명령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불우한 삶에 대해 ‘너는 힘이 없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욥기》가 그러내는 인간이 주어진 세계의 불합리를 폭로하고 드러내는 목소리를 지녔다면, 도리어 이 우주적 명령(이를 운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을 듣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이 강포한 명령을 내뱉는 자가 누구인지, 나아가 그 명령 속에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부질없는 ‘말’이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여튼 욥은 침묵하며 ‘듣는다’.

야훼께서 욥에게 대답하셨다.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 (40:1-2)

야훼의 공격은 더 분명해진다. 40장 이하에서는 욥을 더욱 정면으로 이끌어 낸다. 사실 욥이 상대하고 싶었던 것은 세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야훼를 대면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의 비난과 불평, 하소연은 야훼를 향하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야훼는 선을 긋는다. 야훼는 듣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다. 욥의 시끄러운 말이 있었다면 더 큰 목소리가 여기에 울린다. 욥의 많은 말을 집어삼키는 거인의 말. 포효!

네가 나의 판결을 뒤덮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40:8)

여기서 야훼가, 《욥기》의 후반부의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욥이 무고하다하여 그 원인을 야훼에게 돌릴 수는 없자는 것이다. 다음에 읽을 때엔 다른 번역본으로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지만 《욥기》는 분명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다. 그 속에는 몇가지 다른 생각, 주장이 엇갈리며 《욥기》에 실린 어떤 불온한 냄새를 지우거나 가리고자 한다. 따라서 《욥기》에서 부딪치는 것은 욥과 그의 친구들, 혹은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야훼, 사탄의 시험과 바스러지지 않는 강건한 영혼만 있지 않다. 거기엔 야훼와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욥이 건드린 불의함에 대한 질문에 답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답, 즉 질문을 낳은 문제를 풀어내는 힘이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욥기의 이 후반부, 38장 이하에는 폭력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무한함으로 육박해 오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강력한 위력을 지니어 실제로 겁을 주는 존재도 있다. 38~39장의 인간이 제한적 지식과 세계에 묶인 존재였다면 40장 이하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네 팔이 하느님의 팔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 소리와 같단 말이냐? 그렇다면 권세와 위엄으로 단장하고 권위와 영화를 걸치고 너의 분노를 폭발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짓뭉개 주어라. 거드럭거리는 자가 보이거든 꺾어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버려라. 한꺼번에 땅 속에 묻어버려라. 땅굴 속에 가두어버려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 (40:9-14)

이 무력함과 대비되어 베헤봇(40:15)과 레비아단(40:25)이 등장한다는 것은 흠이로운 점이다. 이들은 지상의 존재이기는 하나 인간의 위력을 훨씬 뛰어넘는 힘을 가졌다. ‘모든 권력가가 그 앞에서 쩔쩔매니, 모든 거만한 것들의 왕이 여기에 있다.(41:26)’는 말처럼, 그리고 훗날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이야기했다는 것처럼 이것은 어떤 현실적인 권력으로 눈앞에 드러나기도 한다. 앞의 인간이 신학적 약자로서의 모습이었다면, 여기서는 정치적 약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다면 후자의 문제는 껄끄러운 질문을 낳는다. 욥의 말은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불평에 그칠 뿐인가.

42장은 대단원이다. 여기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42:3-6)

《욥기》에서 구원이라는 주제를 만날 수 있다면, 소박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는 세계의 신비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야훼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욥과 대립했던 친구들의 말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제한적 존재로서의 자기 성찰이 아닐까? 여기에는 어떤 ‘신비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때 야훼를 만나게 된다. 이 야훼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짊어진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욥기의 ‘불편한 결말’은 그가 잃었던 건강을, 소유를 회복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것도 갑절로. 그래서 그는 더욱 큰 부자가 되었고, 140년이나 살았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이 욥이 건드렸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일까? 욥이 내놓았던 절박한, 절실한 질문들에 대해, 그 아우성에 대해 야훼의 폭력적인 말이 침묵을 명하고 다만 ‘축복’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이 과연 답일까?

42장은, 특히 이 끝 부분은 나쁜 냄새가 난다. 누군가 붙여놓은 이 아름답지 못한 결말은 욥이 열심히 파내려간, 땀흘려 만들어놓은 집요한 질문의 그물을 한꺼번에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 결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이야기를 ‘축복을 위한 고통’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답을 위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축복을 장식하기 위한 고통. 당연히 고통이 처절할 수록 그 뒤의 보상은 달콤하겠지.

야훼께서 욥과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42:8)

세 친구에 대한 야훼의 평가. 흥미롭게도 야훼는 그들에게 ‘터지는 분노’라는 표현을 쓴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그들은 야훼에 대한 변론에 앞장섰던 인물이 아닌가? 야훼를 향한 욥의 화살을 꺾어버리고자 한 게 아니었나? 그러나 야훼는 말한다. 그들은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고. 과연 이 솔직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세계를 직면하여 느끼는 날것 그대로의 감성을 가리키는 말 아니겠나? 특정한 해석에 묶여있는, 대답되고 설명되기 위해 도출된 이야기들이 아닌. 단절되고 꼬인 그 자체로서의 이야기들. 욥에서 읽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 세계에 대한 매끈한 설명이 아니라 우둘투둘 거칠고, 날카로우며, 불친절하고, 우리를 배신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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