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엘리후 (욥기 32-37)

친구들의 말이 끝나고 욥의 말도 끝났다. 이들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린 채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람족 출신인 부스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람족 출신인 부스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가 욥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하느님보다도 옳은 체하는 것이 괘씸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욥의 세 친구에게도 솟아오르는 의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답변다운 답변을 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잘못이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욥과 말을 주고받는 동안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2:2-4)

이렇게 32장에서 시작한 엘리후의 말은 37장까지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중간에 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욥에 대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욥은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엘리후의 말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 아닌지 의문시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그 이유로는 먼저 ‘람족 출신인 부스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라는 설명이 그렇다. 이는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1:1), ‘데만 사람 엘리바즈와 수아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바르'(2:11)라는 소개와 크게 다르다. 대체 ‘람족’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인물 소개가 다른 점은 앞 부분과 일관성을 의심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또 다른 하나는, 내용은 둘째치더라도 시작하는 부분에서 욥과 세 친구를 모두 싸잡아 비판하며 마치 야훼의 변호인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기의 끝에 야훼가 등장할 때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욥과 세 친구의 팽팽한 싸움 가운데 야훼가 등장하여 욥의 편을 들어주고 세 친구를 꾸짖는 식으로 끝나는데, 이토록 많은 말을 뱉어놓은 엘리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이 이상하다. 따라서 《욥기》의 전체 흐름 가운데 따로 떼어놓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후의 발언이 담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일단 위에서 인용한 3절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 엘리후의 말은 명확히 욥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세 친구의 또 다른 화신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세 친구에게도 분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개역개정: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새번역: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단 이들은 욥의 주장에 제대로 반론을 내놓지 못했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그렇게 변변한 대답없이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르게 옮기면 세 친구는 욥의 욥의 잘못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공동번역에서는 또 다른 표현이 등장한다. ‘결국 잘못이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 욥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못하였기에 야훼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전개되어 버렸다. 이후 엘리후의 태도를 보면, 야훼의 변호인을 자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마 공동번역의 풀이가 더 적절할 듯 싶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엘리후의 말이 후대에 삽입되었던 까닭은 욥의 한탄에 담긴 야훼에 대한 원망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세 친구가 욥에게 고통의 원인을 캐묻는 자였다면, 엘리후는 고통에서 묻어 나오는 원망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네 죄가 네 고통을 낳았다’고 말한다. 후자는 ‘하느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은 욥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또한 욥과 야훼, 인간과 하느님으로만 본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시각은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은 부조리한 세계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고통을 빗겨가는 매끈한 신앙이 여기에 있다.

… 하느님은 사람과 비길 수 없는 분이오. 그런데 당신의 말에 한마디 답변도 않으신다고 해서 어떻게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겠소? 사람이 모를 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은 이런 길도 저런 길도 있다오. (33:12-14)
수많은 하늘의 천사 중 하나가 나타나 일깨워준다면, 마음을 바로잡으라고 일러준다면 다 되는 일, 이렇듯이 자비를 베푸시어, ‘살려주어라.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여라. 나 이미 속전을 받았다.’하고 말씀해주신다면 그의 근육은 젊은이처럼 팽팽해지고 혈기왕성하던 한창때로 돌아갈 것이오. 하느님께 빌기만 하면 은총을 받아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되지 않겠소? 하느님께서 그의 무죄를 선포해 주시지 않겠소? (32:23-26)

전형적인 신앙인의 말이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알지 못하니 침묵하라. 하느님께 은혜를 구하라. 인간은 전능자에게 은혜를 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 호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의 귀결이 ‘닥치고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너무한 것일까?

… 그렇게 앞이 캄캄한데 하느님께 무슨 말씀을 올려야겠단 말이오? ‘제 말을 들으십시오.’하고 말한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정녕 당신의 말을 들으셔야 한단 말이오? (37:19-20)

엘리후가 분노하는 것은 욥의 호소가 기존의 간결한 신앙체계를 흔들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이토록 불의한데 신은 어디있는가? 엘리후는 이렇게 신의 소재를 묻고, 신의 입장을 묻는 물음에 대해 분노한다. 대체 인간이 어찌 하느님을 판단한단 말이냐라며. 그러나 이는 거꾸로 전능자라는 초월자의 자리에 신을 올려놓고 저 아래에서 구경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내비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렇게 전능한 신이야 말로 거꾸로 빛나는, 그러나 아무런 생기를 잃어버린 박제화된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믿음이 강한자, 전능함을 이유로 신을 저 고귀하고도 깨끗한 장식장에 보관하려는 정신이야 말로 신의 능력을 거부하며 제한하는 이들이 아닌가. 우상이란 다른 것이 아닌, 이 믿음과 신앙이 만들어낸 저 빛나는 결정체를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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