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 김재준

1933년 5월에 발간된 신학지남 69호에 실린 김재준의 〈욥記에낫타난靈魂不滅觀〉 가운데 일부를 오늘말로 옮겼다. 한자 표기된 것을 단순히 한글로 바꾼 것도 있고, 일부는 오늘날 쓰는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다. 본래는 전문을 옮겼으나 현재 유료 서비스를 하는 논문 전체를 공개할 수는 없어 일부를 옮기고 그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덧붙이기로 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http://www.dbpia.co.kr/Article/129383

욥기에 영혼불멸의 신앙이 명백히 나타나있는가 없는가하는 문제는 온전히 욥기 19장 25~27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렸다.

위 본문의 번역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개역개정: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공동번역: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그러나 젖먹던 힘마저 다 빠지고 말았구나.

김재준은 개역개정에서 ‘육체 밖에서’로 옮긴 부분에 대해 다룬다. 이를 공동번역에서는 ‘살같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새번역에서는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로 옮겼다. 이런 차이에서도 볼 수 있듯, 개역개정의 경우엔 육체를 벗어난 영혼을 생각하게 하는가 하면,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의 경우에는 그와 다르게 읽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김재준은 몇 가지 영역본을 소개한 다음 당시 우리말 번역, 조선역朝鮮譯을 옆에 붙여 비교하고 있다.

조선역朝鮮譯
“내가 알거니와 나의 구주가 살아게시니 후일에 따우에서시리로다. 나의 이가죽이 썪은후에 내가 이육체를 떠나 하나님을 보리로다”

… 이보다도 더 미묘한 것은 여기 있는 전치사 ‘민’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전치사는 영어로 ‘From: 로, 으로’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Away from, 떠나’로도 번역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전자를 취한다면 욥의 말하고자 한 것은, 내 가죽이 비록 썩어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남은 육체로 하나님을 목도하겠다는 뜻이 될 것이니, 다시 말하면 현세에 살아 있는 동안 기여코 하나님을 뵙겠다는 것임에 영혼불멸의 신앙과 관계 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며 만일 후자를 취하여 ‘육체를 떠나’라고 번역한다면 그 반대의 사실을 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김재준는 ‘히브리 본문을 옮기는 것은 생략하고 최근 영역을 찾아보면’이라고 말하며 여러 영역본을 소개하며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이 엇갈린다는 점을 짚는다. 과연 이 부분을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아무래도 통상적인 신학적 관점에서는 영혼불멸관을 바탕에 깔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은 조심스럽다.

…그래도 아주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선은 원문의 의의가 명확히 불분명한 까닭에 누구나 전후의 문맥을 보아 좋도록 해석한 것임에 각자의 억측에 따라 그 결론을 달리한 것이며 데이비슨의 숙련熟練한 논문을 읽은 후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의심의 생각이 아주 사라지지 않는 것은 욥이 만일 이 구절에서 정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고백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왜 그가 가장 분명하고도 보통 쓰는 말 ‘육肉’과 ‘영靈’을 대립시켜서 ‘내 육肉이 없어진 후에도 내 혼魂으로 하나님을 뵙겠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어색한 말 ‘가죽(皮)’과 ‘육신(肉)’을 대립시켜서 ‘내 가죽이 없어진 후에 내 육신으로(혹은 육신을 떠나) 하나님을 뵙겠다’고 하는 불문명한 표현을 했을까. 그도 역시 전통신앙인 황천설(Doctrine of Sheol) 때문에 명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까닭이다.

물론 욥은 현세에서 더 오래 살기를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는 때 그는 극도의 불평과 낙담을 표시하였으니 이는 그의 사유 가운데에 있는 ‘삶(生)’이라는 관념은 순전히 현세의 삶(生)을 의미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욥기》에는 무덤, 스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런 부분에 주목하면 과연 욥에게 내세관, 후대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욥의 시선은 현재의 삶을 향한다. 그렇다고 욥이 완벽하게 현세적 세계만 이야기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밖에도 그는 같은 의미의 괴로운 탄식을 많이 말하였으니 10장 9-13절에는 인생이란 거룩한 토기장이의 손으로 빚어 만든 한 조그마한 흙덩이에 숨과 생각과 영(靈)을 넣어 놓은 것으로 결국은 다시 무의미한 티끌가루로 돌아갈 밖에 없는 것을 원망스럽게 말했으며, 13장 28절에는 그의 생명이 날로 썩어져서 좀먹은 의복같이 떨어져 가는 것을 괴로워하였으니 다 명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찾지 못한데서 생긴 괴로운 고백인가 한다.

위에 언급된 성서 본문을 찾아보면 이렇다. 번역은 모두 개역개정에서 가져왔다. 아래 인용하는 성서 본문은 특별한 표기가 없으면 모두 개역개정을 참고했다.

10:9-13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3:28 사람이 술부대가 삭아 떨어지듯 옷이 좀먹어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러면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 줄 믿었는가? 3장 1-22절에 그는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한 후에 죽은 자의 평화로운 정숙과 안식을 부러워서 이렇게 노래했다.

외 무릅이 나를 받들엇으며 외 가슴이 나를 젓먹엿던고 그러지안엇던들 지금에 나는 고요히누어 평안히잠자고 있을 것을! …… 강자가 약탈을 끗치고 약한자가 마음놋코 있는곳! 간역(看役)군의 (독한) 소래를 들지안는곳! 큰자와 적은자 분간이없고 노예가 주인에게서 노힘받은곳! 오. 하나님 외 수난자의게 빛을 주시나있가 외 쓰린낙망에 있는 인생의게 삶을 주시나있가 (욥 3:12-14, 17-20)

오늘날의 번역과 비교해보자. 참고로 글에서는 3:12-14라고 했지만 12-13을 잘못 표기한듯 하다.

3:12-13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

3:17-20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3장은 욥이 모든 소유를 잃고 이어 온몸에 피부병을 앓은 뒤에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나아가 죽음을 바라기까지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괴로운 ‘죽음의 찬미’를 듣는다. 이 정숙과 안식으로 표현된 사자의 세계는 음산한 스올(Sheol)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데이비슨이 《구약신학》 49쪽에 말한 바와 같이 ‘무덤의 모습과 죽은자의 육체적 상태를 상상’하여 시적으로 착색한 것임이 분명하니 구태여 교리적문제에 올릴 필요는 없는 줄 안다. 이밖에 다른 곳에서는 시종일관하게 죽으면 음부(Sheol)로 내려간다는 것을 거듭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인 것처럼 말하였다. 이 스올은 ‘암흑의 세계, 음산과 혼돈의세계, 거기에 비추는 빛이란 암흑 그것'(10장 21-22절)이며 이 세상과의 관계는 아주 끊어지고(14장 21절) 거기에서 나올 소망도 없는(10장 21절)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참고한 성서 본문을 옮겨둔다.

14:21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10:21-22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공동번역의 경우 표현이 더 참담하다.

10:21-22 잠시 후에 나는 갑니다. 영영 돌아올 길 없는 곳, 캄캄한 어둠만이 덮인 곳으로 갑니다. 그믐밤 같은 어둠이 깔리고 깜깜한 가운데 온통 뒤죽박죽이 된 곳, 칠흑 같은 흑암만이 빛의 구실을 하는 곳으로 갑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욥의 내세관이 대체 어떠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삶의 유일한 실재성은 오직 현세의 ‘삶’에 있는 것이요 사후에는 암흑과 혼돈 그 자체인 스올에서 ‘삶’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희미한 끊없이 늘어진 반의식의 ‘존재’를 연속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14장 13-15절에 그는 이 스올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을 말하였으나 그 다음절 16-22절, 특히 19절-22절에서 즉시 그런 희망이 불가능한 것을 스스로 명확히 말해버렸다.

그러면 이런 사상적 배경을 가진 욥에게서 명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없다는 이론이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상당한 무게가 있음을 인정 안할 수 없는 줄 안다.

14:13-15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4:19-22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

김재준은 《욥기》에서 명확한 영혼불멸관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설사 죽더라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스올에 내려가 암흑속에 갇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멸하는 무엇, 그의 표현을 빌리면 ‘끊없이 늘어진 반의식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 글의 방향이 바뀐다. 《욥기》에서 영혼불멸관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았지만 정작 그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반대로 어째서 욥이 그런 말을 했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욥의 내세관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의 사상을 전적으로보아 그 곡절이 있는 움직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욥은 인생의 순례자이다.

그의 기록은 책상 위에서 담단논법으로 쌓아 올린 논리의 전당은 아니었다. 차라리 인생의 광야에서 길찾아 헤매이는 눈물겨운 고민의 고백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그에게는 변천이 많고 모순과 자가당착도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욥의 말에는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는 죽음 뒤의 안식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 뒤에 닥칠 음산한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을 보이기도 한다. 하느님에게 원망을 내뱉는가 하면, 그의 변호를 적극적으로 바라기도 한다. 이런 모순성… 김재준은 이것이 삶의 본 모습이라 보는듯하다. 본디 삶이란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찾기 힘든 게 아닌가?

그렇다고 제멋대로 사는 삶을 그저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욥도 그렇지 않았다. 잡지의 이름 《신학지남》이라는 말처럼, 욥에게도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나침반이 향한 그곳이야 말로 욥의 신앙이 성취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는 안정없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더듬에 헤맸다. 그러나 그의 품안에는 한 작은 나침반이 있어서 그의 나아갈 방향을 멀리 가르치고 있었으니 그 바늘의 한쪽 끝은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또 한쪽 끝은 그의 양심 — 결백한 양심 — 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이 바늘만은 항상 같은 곳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리고 내 양심은 결백하다. 그런고로 이 현재의 참상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하는 것이 그의 속임없는 심정이었다.

인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다 내게는 소망이 없오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앞에서 내길을 변호하오리니 경건치못한자가 그의앞에 올길이 없아오매 이것이 나의게 구원의 표가 됨이외다. (욥13:15-16)

‘만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결백한 사람을 무고히 매장해 버릴 리는 없을 것이다’하는 것이 그가 붙잡고 놓지않는 가장 큰 진리였다. 이 신념이 그에게 잠깐이나마 스올에서 부활할 희망도 보게 하였으며(14장 13-14절), 아벨의 피가 땅을 적시인 때 하늘에 계신 증인이 이를 변호해준 이야기를 연상케 하기도 하였으며(16:18-19), 심지어 옛 이야기를 싣고 고요히 서있는 비명에 호소할 생각도 나게 한 것이었다.(19:23-24)

이렇게 수난자의 윤리적 선후책(先後策)을 생각하고 있는 반면에 그 보다도 더 큰 문제가 그를 괴롭게 하였으니, 즉 대체 의인이 고통 당할 까닭이 무엇인가, 무고한 피가 땅을 적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게 직접 물어보기를 요구한 것이다.

나는 오직 전능한이의게만 말슴들이렵니다. 나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만 바라고 있읍니다. (욥 13:3)

이리하여 그의 문제가 간절한 기원, 그의 탐구와 기도는 마침내 그를 피스가의 높은 봉우리에까지 인도하였고 거기서 그의 오랜 간구에 대한 확증의 세계를 전망하게 하였으니, 곧 이번 연구의 주제인 19장 25-27절에 있는 말씀이다. 거기에서 그는 (1)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결백한 것을 변호해주시리라 (2) 그가 틀림없이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하는 두 가지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바라본 것이었다. 어느때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생전에 상취되던 사휘에 되든 또는 그가 보통육안으로 하나님을 뵙던, 가죽이 다 벗겨진 고기덩이인 몸으로 그를 뵙던, 부활한 새로 지음받은 몸으로 그를 뵙던지, 아주 육肉에서 떠난 영靈으로 뵙던지, 이런 것은 그에게 그다지 크게 관심한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참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 그야 살던지 죽던지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의’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스트란(Strahan)이 스멘(Smen)의 책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욥은 분명히 말한한 바가 없다. 그가 생각한 생명의 회복이란 것은 그의 정의감의 체현에 불과하다. 즉 현세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그의 정의감이 그의 믿음의 목표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하여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설적 신앙인 음산한 스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정의감은 이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희미하나마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영혼불멸의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결백한 양심’에 그 작은 싹을 돋치었다. 마치 작은 상수리 나무 열매가 위대한 장래의 가능성을 품고 가시덤불 속에 그 조그마한 싹을 돋친 것같이.

6쪽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을 읽으며 마지막 부분에 크게 감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두쪽의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옮겼다. 가장 눈이갔던 문장은 이것이다.

‘어느때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생전에 상취되던 사휘에 되든 또는 그가 보통육안으로 하나님을 뵙던, 가죽이 다 벗겨진 고기덩이인 몸으로 그를 뵙던, 부활한 새로 지음받은 몸으로 그를 뵙던지, 아주 육肉에서 떠난 영靈으로 뵙던지, 이런 것은 그에게 그다지 크게 관심한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욥에게 불멸하는 영혼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욥기》 에서 영혼불멸을 이야기한다면 이 열망에서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김재준은 이를 ‘위대한 신앙’이라 부른다. 이는 그 시작이 위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치 커다랗게 자랄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불멸하는 영혼, 이것은 신앙인에게 믿음의 출발점인가? 오히려 이런 공리公理를 세워놓고 그 위에 쌓아올린 신앙이라는 것이야 말로 삶을 배척하고 이 규칙에 삶을 끼워맞추기를 강요하는 건 아닐까? 믿기 때문에 믿는다는, ‘믿습니다!!’의 무한반복 이외에 다른 신앙이란 없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신앙이란 본디 출발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요청되고 확인되며 자라나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그 토양은 구체적인 삶이어야 하며, 거기에는 다양한 정감과 충동, 욕망이 얽혀 있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도리어 오늘날 교회에 가득차 있는 것은 지독히도 현세적 신자들, 설교자의 성대를 울리는 소리에 ‘아멘’이라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인형들, 삶을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바랄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무능력하고도 가난한 영혼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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