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는가? (욥기 20-31)

한동안 우울함과 게으름에 빠져있었다. 기왕에 시작한 《욥기》 읽기를 그대로 멈출 수는 없는 일. 여튼 꾸역꾸역 남은 부분을 보려한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적당히 나누어 읽기도 쉽지 않아 다루는 부분이 늘었다.

20장은 소바르의 말로 시작한다. 욥의 세 친구는 엘리바즈 – 빌닷 – 소바르 순서로 욥에게 이야기를 건낸다. 그리고 욥은 각각의 주장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각자 총 3번씩 욥에게 말을 건내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다만 소바르의 경우 세번째 말이 있는지 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여튼 20장은 소바르가 두번째로 욥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소바르 역시 야훼의 정의로움에 대해 주장한다.

그래, 자네는 도무지 몰랐더란 말인가? 사람이 땅에 나타나던 한 옛날부터 악인의 웃음소리란 금방 멎는 것이요, 위선자의 즐거움이란 찰나에 사라진다는 것을, (20:4-5)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 그것도 이 땅에서. 그러나 정녕 그런가? 우리 주변에 악한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인간들을 여럿 볼 수 있지 않나. 욥은 그런 불의에 주목한다.

악한 자들이 오래 살며 늙을수록 점점 더 건강하니 어찌 된 일인가? 자식들이 든든히 자리를 잡고 후손들이 잘사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하지 않는가? 그들의 집은 태평무사하여 두려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없지 않는가? (21:7-9)
이런 악인의 등불이 자주 꺼지던가? 재난이 그에게 떨어지던가?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시던가? (21:17)
무덤으로 실려가면 무덤지기가 있어 지켜주며 언덕의 흙을 따뜻이 덮어주고 조객은 줄을 지어 뒤를 따를 것일세 (21:32-33)

세상은 악하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악한 인간이 떵떵거리며 위세를 떨치고 살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몸도 건강하다. 게다가 자식까지 잘 산다. 그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 죽음 뒤에 이들에게 어떤 심판이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욥기》에서는 제한적인 삶을 사는,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려진다. 누구나 결국엔 저 땅 밑으로 끌려 내려간다. 그리고 그 뒤는 모르겠다. 그러므로 심판이 있어야 한다면 이 땅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는다면, 그 자식에게라도 화가 미쳐야 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자식도 잘 산다. 죽음이라도 비참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음까지도 편안하다. 죽어서도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아름다운 무덤을 갖는다. 세상이 악한 이유는 악한 이들이 잘 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난한 이들의 것을 빼앗아가면서.

악한 자들은 지계표를 멋대로 옮기고 남의 양떼를 몰아다가 제 것인 양 길러도 좋고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 과부의 소를 저당잡아도 되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밀쳐내니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들은 아예 숨어야 하는가. 들나귀처럼 일거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행여나 자식들에게 줄 양식이라도 있을까 하여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저 모양을 보게. 악당들의 밭에서 무엇을 좀 거두어보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줍는 가련한 신세,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밤을 새우고 덮을 것도 없이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몸, 산에서 쏟아지는 폭우에 흠뻑 젖었어도 숨을 곳도 없어 바위에나 매달리는 불쌍한 저 모습을 보게. 아비 없는 자식을 젖가슴에서 떼어내고 빈민의 젖먹이를 저당잡아도 괜찮은가,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나들이를 해야 하고 빈 창자를 움켜잡고 남의 곡식단을 날라야 하는 신세, 악인들의 돌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포도 짜는 술틀을 밟으면서 목은 타오르고 죽어가는 자의 신음 소리와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하시네. (24:2-12)

《욥기》 전체에서 가장 절절하게 읽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불평등! 어떤 인간은 삶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어떤 인간은 타인을 소외시킨 댓가로 안락한 삶을 얻는다. 빼앗는자들, 착취자들, 자본가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는다. 이들의 탐욕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젖먹이의 것까지 서슴없이 빼앗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밤에 비를 맞으며 빈 배를 욺켜쥐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들은 잔혹한 노동에 던져진다. 술틀을 밟으며 맛난 술을 만들지만 정작 이들이 마실 것은 없다. 대체 이런 부조리를 하느님은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는가?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야훼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 세상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에 나타난 야훼는 도리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전능자과 인간의 거리는 너무 멀어 소외된 자들의 호소가 그에게 닿지 않는 것 같다. 욥의 억울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욥이 바라는 것은 하나 뿐이다. 내 목소리가 닿기를. 내 호소를 들어주기를!

그가 어디 계신지 알기만 하면, 당장에 찾아가서 나의 정당함을 진술하겠네. 반증할 말도 궁하지는 않으련만. 그가 무슨 말로 답변하실지를 꼭 알아야겠기에 그가 하시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야겠네. 그가 온 힘을 기울여 나를 논박하실까? 아니, 나의 말을 듣기만 하시겠지. 그러면 나의 옳았음을 아시게 될 것이고 나는 나대로 승소할 수 있을 것일세. 그런데 앞으로 가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런데는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23:3-10)

공동번역에서는 호소를 듣는 것이 곧 욥,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재판에 끌려온 욥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억울함이 야훼에게 닿는 것이다. 세 친구(?)는 도무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랬으면 좋으련만 야훼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이 세상일엔 도무지 관심 없는 저 세계의 신일까? 그래도 욥은 하나의 믿음을 놓지 않는다. 그가 나의 발걸음, 행적을 아실 것이라는, 나의 무고함, 순금 같은 깨끗함을 아실 것이라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라는 부분은 기독교인들에게 《욥기》의 여러 문장 가운데 가장 익숙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공동번역의 풀이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단련의 결과로서 ‘순금 같이’ 깨끗해지는 연단의 삶이 있다. 고통은 성숙을 위한 과정이다. 그러나 공동번역을 따르면 그렇게 볼 수 없다. 욥은 끊임없이 자신의 고난이 의미 없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다른 번역을 옮겨둔다.

새번역::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가톨릭성서:: 그분께서는 내 길을 알고 계시니 나를 시금해 보시면 내가 순금으로 나오련마는.

공동번역을 기준으로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욥은 한결같이 이 고난의 부당함에 주목한다.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는 친구들의 말에도 단호하게 이렇게 대꾸할 뿐이다.

내가 머리를 숙이고, 자네들이 옳다고 할줄 아는가? 어림도 없는 일, 나, 숨지기까지 결코 굽히지 않겠네. 나에게는 잘못이 하나도 없네. 내가 죄없다는 주장을 굽힐 성싶은가? …(27:5-6)

욥은 집요한 인간이다. 그의 단단한 말은 친구들의 말을 차례로 물리치고 결국 이들이 두 손을 들어 포기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그 재판장에서 자신의 바람대로 야훼를 불러 세운다. 그의 호소는, 불평은 야훼를 불러세우는 소리였다.

이 부분에서는 크게 두 부분이 다른 번역과 크게 다른데, 기왕에 짚어둔다.

하나는 24:18-24의 위치 문제. 공동번역에서는 이 것을 27:23 이후로 옮겨두었다. 그리고 26:1-4도 26:14 이후로 옮겼다. 친구들과의 논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23장-24장은 엘리바즈의 세번째, 마지막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 된다. 이어 25~26:14 빌닷의 세번째,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26:1-4를 옮기지 않았다면 25장이 빌닷의 말, 26장 이하가 욥의 말이 된다.

다른 하나는 소바르의 세번째 말의 유무 문제이다. 공동번역의 경우 소제목을 붙여 대략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했다. 이것을 따르면 27:13-28은 소바르의 말이다. 그러나 다른 번역들은 이를 욥의 말로 본다. 과연 어떤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전 텍스트를 찾아볼 수도 없는 일이고, 설사 찾는다고 하더라도 의미의 흐름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데 크게 구분되는 점을 찾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공동번역을 따르면 27:1과 29:1에서 욥이 말했다는 부분이 중복되는 이유를 해결할 수 있다.

세 친구의 공격에도 욥은 계속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다만 마지막 31장에서 욥이 자신의 결백을 넘어 선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이는 아마도 욥이 부자였다는 점 때문에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욥이 부자였다는 점은 그가 고난을 당하며 모든 소유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앞서 가난한 이들의 척박한 삶을 이야기한 이상 부자인 그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까?

내가 만일 남종의 인권을 짓밟았다든가 여종의 불평을 묵살해 버렸다면 하느님께서 일어나실 때 어떻게 하며 그가 심문하실 때 무엇이라고 답변하겠는가? 나를 모태에서 생기게 하신 바로 그 분이 그들도 내시지 않으셨던가? 내가 가난한 사람을 모른 체하였던가? 과부들의 눈앞을 캄캄하게 해주었던가? 나의 분깃을 혼자만 먹고 고아들에게 나누어줄 생각도 없었던가? 아니다, 아비가 제 자식을 키우듯이 나는 그들을 어릴 적부터 키워주었고, 나면서부터 손을 잡아 이끌어주었다. 걸칠 옷 한 벌 없이 숨지는 사람, 몸 가릴 것도 없는 빈민을 못 본 체라도 했단 말인가? (31:13-19)

그는 종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과부와 고아들에게 이렇게 대해주었다고 말한다. 이는 거꾸로 《욥기》가 전하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을 혹사시키지 않으며, 이들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의 호소를 들어야 하며, 이들의 삶을 구제해 주어야 한다. 벗은 몸에겐 옷을 주어야 하고, 굶주린 배에겐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이는 한 걸음을 더 나간 것이다. 모른채 한다는 것, 이들의 명백한 고통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 손은 결백한 손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이지 더러운 손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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