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나는 내 눈으로 그를 보리라! (욥기 18-19)

자네야말로 홧김에 제 몸을 물어뜯는 짐승이 아닌가? 자네는 땅을 허허벌판으로 만들고 바위를 제자리에서 밀어내기라도 할 셈인가? 악인의 빛은 결국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을 잃고 마는 것, … 악인의 집은 이렇듯이 비참하고 하느님을 모르는 자의 거처는 이렇게 되고 마는 법일세. (18:4-21)

욥의 친구 빌닷의 두번째 말이다. 《욥기》를 읽노라면 당혹스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닌데, 그 가운데 하나는 욥의 친구가 하는 말이 매우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빌닷은 하느님을 모르는 악인은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그것도 이 땅 위에서. 결국 악한 사람은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던가? 그의 말처럼 악인에게 심판이 주어지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중에 욥이 말할테지만 악한 이들의 배는 기름으로 살찌고, 죄 없는 이들이 굶주리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대체 왜 이토록 이 세상은 불의한가? 기독교인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죄악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죄악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왜 악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가? 최후의 심판 때문이라고 말하리라. 이 땅은 부정하다. 그러나 정말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 설사 그런 것이 있다하더라도 무슨 소용인가? 삶의 고통이 삶 속에서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욥의 친구들은 늘 악을 입에 올리지만, 《욥기》의 이야기는 선악을 넘어있다. 야훼와 사탄의 만남을 기억하라. 대체 왜 욥은 고통을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탄 때문인가 야훼 때문인가? 대답하기 힘들다. 사탄 때문이라 한다면 사탄이야 말로 전능한 자가 아닌가? 야훼와 욥을 모두 시험한 것이니.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잘 알고 있다. 이 이유 없는 잔혹한 고통의 이유는 저 위에 있는 절대자에게 물어야 한다.

자네들은 참으로 기세등등하여 나의 잘못을 들춰내려고 하지만,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의 그물이라는 것을! 억울하다고 소리쳐도 아무 대답이 없고 호소해 보아도 시비를 가릴 법이 없네. (19:5-7)

욥의 고통은 부당하다. 따라서 거기에는 선악을 가르는 정의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욥이 경험하는 세계는 인과응보가 작동하는 그런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다. 막막한 세계. 소리쳐도 대답하는 이 없고, 도와줄 이도 없는 그런 캄캄한 세계. NIV는 7절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 ‘Though I cry, ‘I’ve been wronged!’ I get no response; though I call for help, there is no justice.’ 법이 붕괴된, 최소한의 정의가 사라진 상황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욥은 변호인, 구원자를 통해 이 상황이 깨뜨려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19:25)

가톨릭 성서는 구원자로, 개역개정은 대속자로 옮겼다. NIV는 Redemmer로 옮겼다. 어느 번역이 옳은지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욥기》를 신약의 눈으로 읽는 것은 조심하자. 여기서 말하는 변호인, 중재자, 후원자가 그리스도 예수를 이야기하는지는 모른다. 도리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욥기》를 축소시켜 해석하는 게 아닐까. 욥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무고함을 대신 증명할, 혹은 야훼를 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줄 어떤 이를 바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유일신 세계관에서 어떻게 가능할지는 미뤄두자. 어쨌건 그는 절대자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따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절대적인 힘이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간절한 호소, 집요함, 처절한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그러나 젖먹던 힘마저 다 빠지고 말았구나. (19:26-27)

욥은 야훼를 만나고자 한다. 설사 자신의 육체가 뭉그러질 지라도! 두 눈으로, 바로 이 땅 위에 야훼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말! 욥은 지독히도 현세적 인간이다. 그것은 그의 말에서 거듭된 ‘무덤’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한다. 그는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심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땅 아래 묻힐 뿐이다. 그 아래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 위에서, 벼랑 끝에서 야훼를 향해 외친다. 내 앞에 나오라, 내 두 눈으로 보리라!!

개역개정은 이렇게 옮겼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죽음 뒤에, 육체를 떠난 뒤에 보리라고 옮겼다. 가톨릭 성서의 번역은 이렇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개신교 교회에서는 늘 천국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통해 이 땅의 부정의를 세계 밖으로 미뤄버린다. 그들이 명백한 부정의에 침묵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떠들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네들이 다루기 쉬워보이는 일들에 대해 그렇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를 원하지 않는다. 왜? 그것은 육체 바깥의 일이므로. 따라서 개신교의 눈에서 보자면 예수가 한 일 가운데 가장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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