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같은 말 (욥기 11-14)

말이 너무 많네, 듣고만 있을 수 없군. 입술을 많이 놀린다고 하여 죄에서 풀릴 줄 아는가? 자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누가 입을 열지 않으며 그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가 핀잔을 주지 않겠는가? (욥기 11:2-3)

세번째 친구 소바르의 말이다. 친구들은 어떻게든 이 부당한 상황을 이해하려한다. 고통의 이유와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욥의 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불평은 영 반갑지 않다. 욥의 항변에 이들이 꿈쩍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껄이는 소리’, ‘빈정거리는 소리’라고 할 정도로 욥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있다. 그것은 욥이 매우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부당함이 고통을 배로 만들기 때문이다.

소바르의 말이 이전 친구들의 말과 조금 차이가 있다면 그는 ‘신비한 지혜'(11:6)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의 지혜에는 다른 면들이 감추어져 있다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기획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야훼의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고통조차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시험이라고 하자. 다 알 수 없으니 받아들이자. 다만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 하늘보다도 높은 그것에 어떻게 미치며 저승보다도 깊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11:7-8)
자신을 잃지 말게, 아직 희망이 있다네. 걱정 없이 마음놓고 자리에 들게. (11:18)

역시나 번역에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11장 6절

공동번역: 자네가 죄를 잊어버린 것도 바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
개역한글: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주셨음을 알라

공동번역으로 읽고 NIV로 대조하면서 보는데, 좀 다르다 싶은 부분은 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을 참고하고 있다. 그런데 6절 번역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다를 수가! NIV의 번역은 개역개정과 가깝다. ‘Know this: God has even forgotten some of your sin’ 그렇다면 개역한글의 번역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하는 게 문제인데, 찾아보니 KJV 번역이 좀 가까운듯 싶다. ‘Know therefore that God exacteth of thee less than thine iniquity deserveth.’

번역의 문제는 나중에 더 찾아보겠지만 공동번역을 기준으로 보자면 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은 특정한 관점이 작동하고 있는 듯보인다. 이어지는 7절의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

NIV: Can you fathom the mysteries of God? Can you probe the limits of the Almighty? They are higher than the heavens–what can you do? They are deeper than the depths of the grave —what can you know?
개역개정: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이 둘을 대조할 때, 하늘보다 높고 무덤보다 깊은 것이란 바로 야훼의 신비와 능력이다. 그런데 개역개정은 하느님이 하늘보다 높고 스올, 무덤보다 깊다고 번역해 놓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를 붙이지 않았겠지. 개역판의 역자는 하느님에 대한 통상적 관점을 가지고 번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욥기》는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과연 이렇게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존재라면, 헤아릴 수 없는 존재라면 과연 ‘믿음’이란 어떻게 가능할까? 욥의 말처럼 의인과 악인을 함께 묻어버리는 신이라면?(9:22)

친구들의 말에 비해 욥의 말은 좀 복잡하다. 친구들의 말에 대한 항변을 담고 있으면서, 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야훼에 대한 호소까지 섞여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대화라는 점에서만 주목하자면 이들의 말은 서로 맞물리지 않고 엇나간다. 서로 이야기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욥이 원하는 것은 좀 들으라는 것이다.

참으로 자네들만이 유식하여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군. 나에게도 그만한 생각은 있다네. 자네들만큼 모르려니 생각하지 말게. 누가 그 정도의 생각도 못하겠는가? (12:2-3)
자네들은 고작 거짓말이나 꾸며내는 사람들, 모두들 하나같이 돌팔이 의사… 입을 좀 다물게. 그러는 편이 현명할 것일세. 나의 항변을 좀 들어보게. 나의 변론을 귀담아 들어보게. (13:4-6)

이들의 말과 욥의 말은 대체 왜 만나지 못할까? 그것은 친구들이 일단 욥의 고통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욥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 이들은 욥의 고통을 그저 처리하고자 한다. 이들은 고통을 해석하려 하며, 욥의 행동을 품평하려 든다. 나아가 뻔한 이야기로 불평을 막아서는 자들이며, 불합리한 세계가 불화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들이다. 매끈한 세계를 원하는 자. 아니, 단절 없는 매끈한 세계에 사는 자. 이들 눈에 파국을 맞은 욥이, 파괴된 욥의 삶이 들어올 리 없다.

태평무사한 자의 눈에는 재난에 빠진 자가 천더기로 보이고 미끄러지는 자는 밀쳐도 괜찮은 자로 보이는 법이지 강도의 장막에 도리어 평안이 깃들이고 하느님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자가 오히려 태평하다네. (12-5-6)

이 부분의 번역도 크게 엇갈리는데, 그저 참고 차원에서 붙여둔다. 아래는 개역한글판.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다만 여기서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자’, 혹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욥은 거꾸로 그렇게 덮어두고 이해하려는 자들이야 말로 하느님을 주무르는 자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하느님의 전능함을, 그 절대성을 말하지만 정말 그런가? 도리어 친구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모습이야 말로 들을만한, 이해할만한, 인간의 윤리와 그 법칙 가운데 매여 있는 신이 아닌가? 그는 선악을 파괴하거나 세우거난 할 수있는 전능자가 아니라 그저 합당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뻔한 신에 불과하다.

그런 허튼 소리를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는 것인가? 그런 알맹이 없는 말을 그를 위해서 한다는 것인가? 자네들은 그에게 아첨이라도 하고 그를 변호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가 자네들 속을 들추어내신다면 자신있는가? 사람에게 하듯이 하느님까지 미혹시키려는가? (13 7-9)

이들에게는 세계를 보는 눈이 없다. 도리어 자신들의 기준에 세계를 맞추고자 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해란 결국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아니라 정해진 답에 맞춰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허튼 소리, 알맹이 없는 말. 결국 이들의 말이란 잿더미와도 같다. 바람에 날려버릴 그런.

공동번역: 자네들의 좌우명은 티끌위에 쓴 격언이요, 자네들의 답변은 흙벽돌에 쓴 답변일세.
NIV: Your maxims are proverbs of ashes; your defenses are defenses of clay. (13:12)

욥이 바라는 것은 이런 허튼 말들을 버리고 야훼를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절대자를 대면하는 것이야 말로 구원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의 앞에 나설 수 있음이 곧 나의 구원일는지도 모르는 일'(13:16) 그는 야훼와 독대하고자한다.

이 세계란 해석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 하니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대면하고 직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욥기》의 결말은 폭풍속에서 욥이 야훼를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 만남. 거칠고 낯선 그 현장이야 말로 욥이 다다른 또 다른 구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욥이 단순히 막무가내로 달려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야훼의 너그러움을 바라는 연약한 영혼이기도 하다. 가난한 영혼이 그러나 처절하게도 정직한 영혼이 여기에 있다.

하느님,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소서. 그리하시면, 나도 당신 앞에서 숨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주먹을 거두어주소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어 두려워 떨지 않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어서 말씀하소서. 서슴없이 답변하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말씀드리겠사오니 대답하여 주소서. (13:20-22)
당신께서 불러만 주심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손수 지으신 것이 대견스럽지도 않으십니까? 지금은 나의 걸음을 낱낱이 세십니다마는 나의 허물을 모르는 체하여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나의 죄를 자루에 넣어 봉하시고 나의 죄악을 모두 지워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1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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