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자가 있을까? (욥기 8-10)

하느님께서 바른 것을 틀렸다고 하시겠는가? 전능하신 분께서 옳은 것을 글렀다고 하시겠는가? 자네 아들들이 그분께 죄를 지었으므로 그분께서 그 죗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네 (욥기 8:3-4)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욥의 말투. ‘언제까지 그런 투로 말하려는가?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바람 같네 그려.'(8:2) 거듭 말하지만 《욥기》에서 ‘바람’은 매우 상징적 기능을 한다. 빌닷은 욥의 불평을 바람같다고 말한다. 한편 욥 역시 친구들의 위로(?)를 ‘바람 같은 말'(21:34)이라 이르기도 했다. 욥의 말은 바람처럼 흩어질 말이다. 그저 삶과 마음을 흔드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폭풍이 된다면? 모르겠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루자. 다만 《욥기》의 결말이 야훼가 폭풍속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욥기》란 ‘바람이 폭풍을 부르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빌닷이 지적하는 또 하나는 분명 죄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엘리바즈의 주장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 구석이 있다. 욥의 아들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까닭이다. 욥 자신은 무고할 수 있지만 그의 자식들이라고 욥처럼 무고할까? 그러니 따져보고 따져보면 이 고통에는 분명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자네는 하느님을 찾고 전능하신 분께 은총을 빌게나.'(8:5) 우리가 일일이 다 알 수 없는 죄가 우리의 삶을 파괴할 때도 있지 않을까? 빌닷은 ‘네가 정말 다 아느냐’고 묻는다.

한편 빌닷은 저 유명한 말의 주인이기도 하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식당에서 수 없이 보았던 말! 공동번역은 이렇게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 물론 《욥기》의 결말은 빌닷의 말에 가깝다. 욥은 잃었던 것을 다시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빌닷의 말처럼 하느님에게 은총을 빌어 얻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거기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한다. 《욥기》는 복을 바라는 자에게 복이 내리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느님 앞에서 죄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와 맞서볼 생각이 있다 하여도 천 마디 물음에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겠지. (9:2-3)

욥은 빌닷의 말을 일부 승복한다. 절대자 앞에 무고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는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그 앞에 지극히 작은 존재일 뿐이다. 인간, 유한자(NIV: mortal)는 절대자의 손에 휘둘리는 존재일 뿐이다. ‘그가 빼앗으시는데 누가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며 ‘왜 이러시느냐?’하고 항거할 수 있겠는가?'(9:12) 이유를 묻는 것은 부질 없다. 사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영역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어떻게 건드릴 수도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힘으로 해보려 하나 그는 장사요, 법으로 해보려 하나 누가 그를 불러내겠는가? (9:19)

욥은 내쳐진 존재다. 그러나 욥의 다른 점은 그 내쳐진 그곳에서 또 다른 길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절대자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가 내 앞을 스쳐 가시건만 보이지 않고 지나가신건만 알아볼 수가 없네.'(9:11) 게다가 그 절대적 힘과 능력 앞에 유한자의 원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기서 선과 악의 문제는 뒷전이다. 그가 선하다고 하여 그 절대적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 ‘그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묻어버리신다네.”(9:22) 욥의 관심은 다르다 친구들은 그 고통의 원인에 주목하지만 욥은 이 고통으로 드러난 부조리, 해결 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문제에 주목한다.

9장에도 번역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일단 16절이 그렇다.

공동번역: ‘내가 불러도 대답조차 아니하시니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믿을 수도 없네’
개역한글: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찌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개역한글에서 야훼는 욥의 불평에 대답한다. 그러나 욥은 불평에 빠진 나머지 그의 대답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번역에서는 야훼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 존재다. 전체 흐름, 야훼와 인간의 절대적 차이에 대해 논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동번역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한편 20절도 다르다.

공동번역: ‘나 비록 죄가 없다고 하여도 그는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시겠고, 나 비록 흠이 없다고 하여도 그는 나의 마음 바탕이 틀렸다고 하실 것일세.
개역한글: 가령 내가 의로울찌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찌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주어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욥이 무고함을 주장하나 야훼가 그의 무고함을 무시하거나 나아가 부정한다는 의미로 풀었다. 개역한글에서는 야훼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욥에게 있는 것처럼 풀어놓았다. 원전을 참고할 수 없으니 대체 어떤 번역이 적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둘의 번역 차는 《욥기》를 읽는데 분명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여튼 공동번역을 기준으로 보면, 욥의 ‘죄’란 구체적인 어떤 악행을 통해 증거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절대자 야훼와 유한자 인간의 격차를 통해 설명된다. 인간이 악하다면 그것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차이 때문이다. 그 앞에 누가 선함을 주장할 수 있을까? 먼지 같은 인간이 감히! 그래서 욥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있다. 신이 인간을 지었다지만, 호시탐탐 인간의 죄를 살피며 심판자로 자임하려 하는가. 왜 신은 인간을 지어놓고 다시 심판자가 되려하는가? ‘그러시면서도 속생각은 다른 데 있으셨군요. 그러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10:13)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이 몸의 허물이나 들추어내고 이 몸의 죄나 찾아내는 것입니까? 당신께서는 내가 죄인이 아님을 아시고 또 아무도 이 몸을 당신의 손에서 빼낼 수 없음도 아십니다. (10:6-7)

신의 횡포에 내쳐진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욥은 ‘흑백을 가릴 분'(9:15)이라는 제 3자를 호출한다. NIV에서는 대분자로 Judge, 개역한글에서는 ‘나를 심판하실 그’로 옮겼다. 개역한글의 번역은 영 불만인데, 왜냐하면 이때의 Judge, 판결자가 있다면 그가 할 일은 이 둘, 절대자와 유한자 사이의 중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신데 나 어찌 그에게 말대답을 할 수 있으며 함께 재판정에 나가자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사이를 중재해 줄 이가 있어 그가 우리의 어깨에 손이라도 얹어준다면, 나를 치시는 그 몽치를 빼앗아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게 해준다면, 나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나에게 있겠는가! (9:32-35)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욥은 ‘재판정’을 바란다. 그러나 절대자를 재판할 수 있는 재판정이 열릴 리는 만무하다. 과연 누가 야훼를 재판할까. 아니, 재판정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욥 자신이다. 그렇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중재자, 변호자, 자신을 대변해줄 존재이다. 과연 이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절대자와 유한자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절대적 존재.

물론 신약적 신학구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욥기》의 세계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삼위일체 신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적 단계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욥의 이야기를 《욥기》 안에서 읽어낸다면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욥은 야훼의 포악함, 무자비함, 절대성을 이야기한다. 야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불친절한 운명과도 같다. 알 수도 없고, 감당해내야만 하는. 과연 그 절대성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일까? 그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뻔한 인과론적 세계에도 빠지지 않고,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냉소적, 무신론적 세계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불평하는 존재이기는 하되, 그 불평속에 또 다른 신을 불러내고 있다. 절대자와 나를 중재해줄 누군가. 그 억울함을 풀어줄 그 누군가! 욥을 통해 도래할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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