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을 저주하노라 (욥기 2-3)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욥 1:21)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2:10)

《욥기》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에 대해 대해 따지는 것, 고통에 대해 따지는 것을 말한다. 야훼는 빼앗기도 하지만, 전 재산과 자식들까지, 거꾸로 나쁜 것을 주기도 한다. 어째서라는 질문은 여기에 끼어들지 않는다. 욥은 어째서 빼앗아가느냐고, 어째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주어지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욥은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는 가만히 빼앗기며, 가만히 고통을 당한다. ‘주고 받음’에 대하여 그는 무심하다. 그러나 그 상황 자체를 그저 수용할 수는 없다. 가져간 것을 빼앗아 간데다, 나쁜 것을 준 상황에서 그에겐 다른 추동이 생겨난다.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긍정하는 길.

마침내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부르짖었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버려라. (3:1-3)

삶이란 부정의로 가득하다. 이유없이 빼앗기기도 하며, 이유없이 고통을 짊어지기도 해야 한다. 그러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욥은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문제삼지 않고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그는 야훼를 저주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탄생을 저주한다. 자신을 배었던 모태를, 자신을 먹였던 어머니의 가슴에 질문을 던진다. 왜 나를 버려두지 않았나?

나 지금 누워서 안식을 누릴 터인데. 잠들어 쉬고 있을 터인데. 저 허물어진 성터에 궁궐을 세웠던 지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나란히! 황금을 자랑하고 은으로 집을 채웠던 성주들과 나란히! 나는 어찌하여 낙태되어 묻힌 핏덩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빛도 보지 못한 벌거숭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3:13-16)

《욥기》의 저술 배경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포로기 이후에 서술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명기적 계약관계가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유대민족에게 축복을 내리는 야훼는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허물어진 성터’일 뿐. 느혜미야와 에즈라 같은 이들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사람이었지만 《욥기》의 저자는 그 성벽을 다시 세우더라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내다본 사람이었을 것이다. 냉소적 시선.

그곳은 악당들이 설치지 못하고 삶에 지친 자들도 쉴 수 있는 곳, 포로들도 함께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노예를 부리는 자들의 욕설도 들리지 않는 곳,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들이 주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곳. (3:17-19)

욥은 죽음을 갈망한다. 왜냐하면 죽음이야 말로 삶의 부조리함이 제거된 곳일테니. 《욥기》가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계급적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높은자와 낮은자, 포로와 노예… 지배자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죽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거꾸로 그것은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준 것은 신이기에. 그렇기에 죽음을 갈망하나 죽음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도리어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빠져 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느님께 영락없이 갇힌 몸, 나 이제 한숨이나 삼키고 흐느낌이나 마시리니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3:23-26)

‘하느님께 갇힌 몸’이라는 표현에 눈이 간다. 개역한글에서는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라고 옮겼다. 욥은 갇혀있는 사람이다. 그는 앞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고, 거꾸로 이 현실을 이겨나갈 힘도 없다. 그가 모든 것을 빼앗긴 존재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고통의 현실 가운데, 그 지점, 바로 그곳에서 욥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고, 과거로 소급하여 원인을 찾을 수도 없는 그 절망적인 순간. 욥은 그 지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앞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하느님에게 느꼈던 두려움과, 그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 포개진다. 이 두려움은 다른 것일까? 아니, 오히려 공명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욥기》의 하느님은 구약 성서의 여느 책들의 하느님보다 훨씬 초월적이다. 그는 폭풍속에 말하는 존재다. 절대자와 삶에 내던져진 자 사이에 있는 깊은 심연, 건널 수 없는 격차. 바로 그것이 욥이 느끼는 두려움의 근원이 아닐까? 어디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에 기댈 수도 없다. 캄캄한 세계 속에 욥은 그렇게 내던져있다.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무작정 반성하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며 부정한다. 자기 삶의 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린 그곳에 욥의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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