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나안은 아니다.

명절에 집에서 교회 문제로 말 다툼을 벌인 후, 서점에서 양희송의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을 사왔다. 마침 여유가 있어 단숨에 책을 읽었다. 책이 얇고 그렇게 깊이가 있지 않은 탓(;;)에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까닭도 있다.

‘가나안 성도’란 ‘안 나가’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 말은 함석헌에 의해 일찌감치 언급된 바 있다고 한다. 나도 누군가 ‘가나안 교회’를 다닌다며 교회를 가지 않는 상황을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이다. 이후 나도 자연스럽게 가나안 교회를 다닌다 말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책을 만나기 전에도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 주소를 설명하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하긴, 교회를 떠난 지 오래 되었으니.

돌아보면 교회를 떠난 게 한 10년은 된 거 같다. 문제는 이미 2003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2002년 중국 선교지에서 1년을 보낸 이후 다시 학교에 돌아왔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이 ‘뜨거운 신앙인’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정착하지 못해 여러 곳을 떠돌았다. 친구들과 지역 교회를 다니기도 했고, 선배를 따라 성공회 교회를 가보기도 했다. 결국 일년 남짓 졸업 전까지 성공회 교회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대학로에 있는 성공회 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발을 끊었다. 그 때엔 그저 답답한 마음에 발길을 끊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77: 신학교 시절 이후로 전혀 업그레이드되지 않는 지식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무지의 강변은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든다. 사실관계의 왜곡과 오류는 주장의 강도를 높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것은, 개신교의 설교 강단에서는 목회자들이 누리는 이런 면책특권 때문에 ‘진릿값의 검증’이란 절차가 효과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설교에 오류가 있더라도 어떤 이들은 그것을 단순한 착오라고 여겨 문제 삼지 않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그것이 진실인 줄 알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하는 일종의 ‘침묵의 나선’이 형성된다. … 이런 양상은 개신교인들의 신앙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도 이어지는데, 그들의 믿음은 무언가가 ‘믿을 만해서(credible)’ 믿는 것이 아니고, 쉽게 믿어버리는(credulous)’ 심성 때문이란 혐의를 자초한다.

답답함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반지성주의 때문이겠다. 교회에는 언제부턴가 ‘인간의 말’을 하지 말라며 상식을 ‘세상의 지식’으로 단죄하고 이를 이야기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교회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이때의 어린아이란 순수함 보다는 말을 잘 듣는 ‘순종’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따지지 말라’는 것과 같다. 질문이 없을 것.

나는 이 금언이 지독히도 싫었다. 하느님을 아는 지혜라지만 질문 없는 지혜가 과연 가능키나 할까? 의문없이 주어진 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누군가는 ‘머리가 굵어졌다’며 혀를 끌끌차겠지만 언제부턴가 목사들의 말에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였다. 감동을 주지도 않았고, 깨달음을 주지도 않았다. 주일의 텅빈 시간을 채우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이게 다 네가 공부를 해서 그런게 아니냐’고 묻는다. 반은 맞는 말이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때로 앎 보다는 질문을 늘여가는 것이며, 확신보다는 의심이 늘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저 목소리 크게 ‘주여!’ 하고 외치면 믿음이 생기고, ‘아멘’이라고 손바닥 치며 눈물을 흘리면 신앙이 깊어지나? 그렇지 않다. 실존적 고민이 없는 신앙은 어쩌면 조금은 숭고한 ‘버릇’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79: 흔히들 ‘신앙은 상식을 초월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겪는 문제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몰상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 안의 숨 막힘은 이렇게 무지와 권력이 결합하면서 뿜어내는 가공할 압박감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학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와 더불어 생긴 일일테다. 모교 한동대학교는 일반 대학과 달라 학교인 동시에 교회이기도 했다. 실제로 학교의 운영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것은 교목실 차원을 넘어 총장과 교수들이 수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교의 교수는 교수인 동시에 사제였다. 학생은 제자인 동시에 영적 자녀였고, 어린 양이었다. 이런 권력의 비대칭 속에 권력의 모순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일.

대학 졸업을 앞두고 벌인, 지금보면 소박하기 그지 없는 몇 가지 활동은 이 ‘무지와 권력의 결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여성학회에 참여하면서 논문을 읽거나 책을 함께 읽기도 했다. 학내 문제를 다루는 대자보를 써서 붙이기도 했다. 졸업 직전 두 개의 대자보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교내 성추행 관련 내용을 폭로한 대자보. 여성학회 회원이 대자보 작성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한참이나 지나서 알았다. 여튼 고요한 학내에 거대한 돌을 던지는 이들 곁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일부 학우들과 함께 쓴 대자보인데, 내용은 둘째치고 떼지 못하게 만들겠다며 일부러 높은 곳에 붙여놓았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이라면 더 지혜롭게, 더 치열하게 싸웠을 테지만 그땐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美口Large’였나? 학내에 글을 쓰며 활동하던 그룹의 이름처럼 한마리 못난 미꾸라지 같은 존재였다. 물을 흐리게 만드는. 누군가는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재미로 그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맞다. 일탈과 반항만큼 짜릿한 즐거움이 어디있나? 그러나 그 재미란 역설적으로 얼마나 억압된 상황에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재미있었다. 숨 쉴 수 있었으니까. 상쾌했으니까.

82: 위선은 종종 자기 모순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술·담배 문제를 신앙의 중요 잣대로 여기는 교회에서 목회자의 성추행 문제를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며 덮어주는 것은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는 풍경이다. 낙태는 태아 살인이라며 생명을 강조하는 교회가 정작 미혼모나 입양아에 대해서 차별적 태도를 갖는 것도 모순이다. 세계선교에 헌신했다는 교회에서 탈북자나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을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심각한 모순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한 친구와 자율학습을 째고 개천 옆에 앉아 콜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일이다. 친구가 물었다.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무슨 패기인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긴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그래서 세상을 바꾼다는 대학에 들어갔다. 아마 평생토록 바꾸자는 말을 그렇게 많이 내뱉은 적은 없으리라. 그러나 학교 안에서 세상을 바꿀 능력이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을 바꾸자고 하지만 세상 일에는 귀를 닫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위선. 저들만의 선함이 나는 싫었다. 세상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안온함이 싫었다. 늘 스스로를 자책하며 회개하고, 영적인 순결을 강조하지만 그뿐이다. 세상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 여린 영혼이란 얼마나 강건하며 고집이 쎈지. 순종하는 양들은 그들이 순종하는 울타리 안의 일 이외에는 늑대처럼 돌변하곤 했다. 겸손하다 자임하는 자들의 교만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무지와 무시, 좁아터진 세계… 이렇게 스스로 자위하고, 더불어 자위하는 공동체에 있다보면 위선을 스스로 자신의 맨 얼굴로 삼아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최소한의 윤리 의식도 갖지 못하며 자신들의 규율에만 전전긍긍하는 이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세습에도 침묵하며, 성추행에도 관용을 베풀고, 거짓말도 정죄할 수 없는 것이라며 두둔한다. 난 이런 모습이 싫었다. 웃는 위선자의 맨 얼굴이 싫었다. 그래서 교회를 나왔다.

88: 데이비드 키네먼과 게이브 라이언은 《나쁜 그리스도인》에서 외부인이 바라본 미국의 ‘거듭난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란 매우 보수적이고, 자신들의 사고의 틀에 갇혀있고, 반동성애 성향에, 낙태반대론자에, 항상 화가 나 있고, 폭력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하고, 자신들이 믿는 것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이 없지요.

교회에 발을 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곳이 교회더라. 저자의 책에서 읽은 미국 교회의 실상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의 현주소가 여기에 있기 때문. 내가 밖에서 지켜본 바로는 2008년 MB 집권 이후 교회의 보수화는 더욱 심각해진 것 같다. 동성애를 정치적 이슈로 꺼내들고 난리를 치는 것도 이와 궤를 함께 한다.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교회를 가고자 했던 마음은 늘 있었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되는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치를 떨게 만들었다. 그들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더욱 자명해졌다.

128: 20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벌어졌을까? 단계별 반복학습을 특징으로 하는 양육구조에는 큰 개선이 없어 보인다. 자치회 구조는 큰 폭의 변화를 거친 것 같다. 나는 불과 몇 년 만에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이런 청년부의 자치구조가 와해되고, 임원단이 목회자의 사역을 돕는 간사 제도로 전환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이다. 청년들은 다만 교회의 목회적 서비스를 누리는 소비자가 되거나, 프로그램 운영에 자원봉사로 시간과 역량을 ‘재능기부’하는 준사역자가 되어버렸다. 신앙 공동체의 전진과 후퇴에 대한 논의는 전적으로 목회자의 목회방침에 속한 것이 되었고, 자치회는 목회를 보조하는 실행기구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그 신앙 공동체의 주체가 아니고, 훈련과 양육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의아하게 여기는 비판적 관점은 이젠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래도 연구실에서 오랜만에 성서읽기 세미나를 열었다. 청소년과 구약성서를 읽기도 했다. 비록 내 손에 늘 쥐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는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책’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교내 총장연임 문제가 터졌다. 꼴을 볼 수가 없어 간섭했다.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에 적지 않게 놀랐다. 모교의 후배들은 내가 보기에 적어도 십 수년 전보다는 훨씬 훌륭한 인성을 갖춘 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훈육과 양육의 대상’, 말 잘 듣는 아이들. 졸업한 울타리 밖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글세…

과도한 평가일지 모르겠으나 재학생들의 현 수준은, 교내의 교육 서비스의 소비자인 동시에 영성 서비스의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아비 친척의 집’을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어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학내 게시판을 훑어본 결과는 그렇다. 영성도 지성도, 인격도 사라진 껍데기들. 아니라면 다행이고 사실이라면 이보다 크나큰 저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한동대학교의 문제만일까. 동력을 상실한 현 세대의 곪아터진 부분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은 아닐런지.

119: … 우석훈은 한국 사회의 20대 중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을 신뢰한다고 대답한 거의 유일한 이들이 강남의 대형교회 청년부에 속한 20대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 전체에서 일관되게 20대 청년들이 알바노조를 만들거나 지역 연대를 결성해야 한다며 “20대여, 연대하라”고 부르짖으면서도, 그 강남 대형교회 청년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선취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 청년들이 한국 사회의 청년문제에 유의미한 기여를 하거나 대안 모델이 되어줄 것이라고는 털끝만큼도 기대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대신 그가 남긴 평가는 이랬다. “그러나 이들은 일종의 사교집단같이 보였다.” 나는 그가 쓴 ‘사교집단’의 ‘사교’가 ‘사교社交’인지, ‘사교邪敎’인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그 둘 다를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들어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오늘도 기뻐 노래하고 서로 함께 얼싸 안고 즐거워하리라. 울타리 안은 늘 언제나 사랑과 기쁨, 믿음으로 충만한 곳이니. 저들이 보기에 배교한 자인 내가 그들의 사랑과 연대를 질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 무리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그저 덩어리로 뭉쳐있어서 제 목소리는 없으며, 대체 제 주장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연대가 필요한 세상, 보듬어줄 공동체가 필요한 세상이다. 교회는 늘 함께하는 자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 그들의 함께 함이 진정한 함께 함이 아님을 알기에 그저 심드렁하게 지켜볼 뿐이다. 도리어 성문 밖에 내쫓긴 자들, 연대하지 않으면 더불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 몰린 자들이야 말로, 어떻게 도무지 엮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연대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나와 다른 사람을 품는 마음이라면, 교회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곳에는 저마다의 끼리끼리 모둠이 있을 뿐이다. 명함들의 교환과 친목질.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165: 전통적인 신학에서 교회의 주요한 본질로 언급하는 것들, 케리그마(kerygma: 선포), 리투르기아(liturgia: 예배), 코이노니아(koinonia: 교제), 디아코니아(diakonia: 봉사), 디다케(didache: 교육)는 조직론이 아니라 기능론에 주목한 것들이다. 에클레시아란 제도적(institutional) 측면보다 수행적(performative) 측면에서 규정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에클레시아는 그런 가치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인 것이지, 영속적으로 유지할 어떤 제도는 아니란 말이다.

교회가 ‘교회의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대체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책에서 현 한국 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이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에 나가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우선 이 책의 독자가 ‘교회 안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나안 성도’ 현상에 대한 진단에 불과하다. 그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얼마나 한국 교회가 엉망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이 귀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도리어 그들은 바깥에서 교회가 수행하지 못하는 다른 일들을 수행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 밖에서 싹트는지 모른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일부 서평에서 보이는 ‘대안 부재’라는 말은 틀렸다. 이 책은 대안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단은 있으나 그 심각성에 비해 치료 방법은 요원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질병의 증거들이야 말로 또 다른 건강의 가능성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니.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그렇다면 교회가 아닌 것, 더 분명하게 말하면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닌 것이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168: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모든 행동과 경우가 다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나안 성도라 이름한 현상 속에서 그 이탈이 정당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경우는 어떤 것이 되겠는가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교회’로부터의 탈출이 이 땅에서 ‘에클레시아’의 왜곡에 대한 강렬한 항의이자 ‘하나님나라’를 위한 새로운 발걸음을 과감히 내딛는 것이라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런 몸짓은 ‘주의 나라’가 하늘에서뿐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이 원하며 기도하는, 그래서 어떻게 ‘에클레시아’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제도권 내의 숱한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지, 절망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책을 읽고난 결론은 이렇다. ‘안 나가’를 거꾸로 해서 ‘가나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만 이는 틀렸다. 왜냐하면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느님의 땅에 이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이들은 가나안에 가기 위해 뛰쳐나온 이들이다. 탈출자들이라 불러야 마땅할지 모르겠다. 잔악한 파라오의 통치와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이곳은 광야가 맞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다른 만남이 있으며, 그 만남은 성소에서 사제를 통해 벌어지는 것이 아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곳엔 목자들이 먹다 버린 썩은 고기가 있지 않고 매일 제 스스로 거두어야 하는 만나가 있다.

나는 이곳의 물이 쓰다며 옛 땅을 그리워한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련다. 물론 옛날 그곳은 또 다른 풍성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광야로 나왔을진대, 이곳에 이른 것은 자의가 아니라 주께서 부르신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불타오르는 그러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를 만나리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부르짖는 선지자도 만날 것이며, 밤 중에 주의 나라를 방문하는 꿈도 꾸리라.

나는 가나안 성도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를 안 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다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나는 가나안에 이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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