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에 대해

* 아래 문제와 이어지는 글. 욕을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임의로 붙였다.

《단속사회》 81쪽::
… 본래 자유주의가 규정한 ‘자유’라는 개념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개념은 다름과 차이를 드러내면 이를 곧 타인의 삶에 대한 개입으로 판단하는 식으로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뒤엎어졌다.

‘자기 자신을 타자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라는 표현이 급진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튀지 않는 것’이 나를 보존하는 원리이자 남을 배려하는 방식이다. 타인에 대해 왈가왈부해서도 안되며 남에게 심려를 끼칠 만한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 하는 사회다. 뒤에서는 수군거릴 수 있지만 정면에서, 혹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거나 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이나 조언을 바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격이자 민폐로 금기시된다. 따라서 상처와 치유는 철저히 사적이고 개별화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사적인 위로와 맞춤형 상담이 공적 토론의 자리를 대체한다. 바우만의 말처럼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인 해결책을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불편함을 그저 배제해 버리려는 사람들이 많네요. 그래서 고작 하는 말이 ‘듣기 싫으니 니 혼자의 공간에서 떠들어라’는 말이죠. 그러나 거꾸로 질문해 보고 싶어요. 대체 그런 꼰대질은, 남의 말을 무턱대고 막아버리려는 그런 폭력은 어디서 배운거죠? 말할 줄 모르는 능력의 부재보다 남의 말을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그런 고집이야 말로 못된 버릇이죠.

아마도 그것은 사유의 부재, 믿음의 철옹성에서 나오는 것일 거예요. 첫째는 생각하기 싫다는 거죠. 이때의 불편함이란 사유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나의 취향과 기호에 맞지 않음이라고 미뤄버려요. 마치 쇼핑 하듯 남의 말을 구매하려는 전능한 소비자의 시선으로 남의 말을 고르고 싶어하죠. 그러나 어쩌죠. 타자의 언어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상황에서 삶으로 파고드는 것을.

이물감이야 말로 주체가 변혁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일거에요. 나와 다른 이질적 사유, 개념, 문제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지요. 그러나 사유에 게으른 인간들은 그저 자기 복제를 끊임없이 하고 싶어하죠. 게으른 자신을 추동하는 이 껄끄러움이 싫은거예요. 그래서 고작 할 수 있는 말이란 ‘듣기 싫어’ 밖에 없어요.

한편 여기에는 자신의 믿음이 깨어질 수 없다는 견고한 고집도 한 몫을 차지하죠. 선험적으로 주어진 믿음의 대상이 굴복하거나 엉클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들은 언제나 취향의 문제를 다루고 싶어하죠. ‘나는 빨간색, 너는?’ 이게 당신들이 나누고 싶어하는 그 고상한 대화의 본질이에요.

그러나 거꾸로 돌리면 깨어져본 경험이 없는 믿음이야 말로 아집과 고집, 자기 확신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그래서 실상 그 믿음에는 ‘고백’이라는 게 자리 잡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고백할 것이 없기 때문이죠. 고백이란 성서에서 말하듯 거듭남,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가능한데 당신들에게는 그게 빠져있기 때문이에요. 그저 남의 말을 반복하고 곱씹는 것에 불과하죠.

싸움이 나지 않고 비아냥이 되는 이유는 그거에요. 대체 주장하고자 하는 말이 없어요. 그저 호불호의 평가에 불과하죠. 아마도 페북을 새롭게 발전시키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별점이 되어야 할 거에요. 댓글에 짧은 감상평을 남기는 대신 별점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이 가득하거든요.

논리와 사유에 게으르다면 센스라도 있던가. 자신의 밑바닥을 이렇게 쉽사리 까발리는 인간성은 대체 뭘까요? 혹시 모르죠 그렇게라도 자신을 과시해야 하는 독특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러고 보면 바바리를 두르지 않은 바바리맨이 참 많아요.

메일 보내기

아무 내용이나 상관 없어요. 메일을 보내주세요.

보내는 중입니다..
또는

로그인하세요.

계정 내용을 잊으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