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 페북 총동문화 게시판에 써 놓은 글을 옮겨둔다. (2015.02.25)

지난주 수요일 책을 사러 교보에 들렀습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상 앞에는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위해 단식하는 유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단식 3일째. 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단식하고 있다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이 무더운 날씨에 그저 농성하는 것이라면 시원한 물이라도, 간단한 먹거리라도 응원차 건네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말을 건내기엔 그들이 짊어진 무게에 비해 고작 지나가는 말 하나는 너무 가벼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둘었습니다. 그저 서명 용지에 이름을 적고 돌아왔습니다.

그 광장이 그렇게 슬픈 적은 없었습니다. FTA를 반대한다고 나갔던 비 내리던 그 날도, 명박산성 앞의 전경차를 끌어내던 그 밤도, 살수차들이 물을 뿜어내던 그 날도, 땡볕 아래 나부끼는 슬픈 노란 리본의 강렬함에 묻혀버릴 겁니다. 그 무거운 공기는 수천명이 모였던, 수십만이 모였던 그 함성보다 묵직하게 그러나 조용히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엄마부대’라는 이들이 그곳을 찾아가 지껄인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죽으라 했느냐’며 그들은 마구 가시 돋친 말을 내뿜었습니다. 미친 개가 짖으면 침을 뱉으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소리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말이 이땅에 사는 누군가의, 나는 알지 못하지만 어떤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생을 살리고, 유벙언을 잡아서 충분한 보상을 해줄 테니 닥치라는. 모든 인간에게 고귀한 추모조차 물신에게 팔려버리는 것이 이 나라의 맨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시 광화문에 들렸습니다. 아들과 산책삼아 나갔다가 일부러 들렸습니다. 경찰들이 깔려 있더군요.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무전을 엿들었습니다. ‘어버이 연합’이라는 단어가 몇 차례 들렸습니다. 아, 오늘도 누군가 난동을 피운답시고 오는구나. 이 무더운 날씨에도 저들의 악담은 그치지 않는구나. 이 부끄러운 나라의 심장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기묘한 부조화를 만들었습니다.

단식 8일차. 금식을 해봐서 알지만, 사흘이 넘어가면 기운이 없고 정신이 흔들립니다. 잠도 잘 오지 않고, 세상이 멍해집니다. 그런데도 그 앞에서 악다귀를 하는 인간들이 있다니. 그래도 오늘은 1인 시위를 하며 몇 분이 그 곁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넓지 않은 광장 양쪽으론 관련 동영상이 나옵니다. 사실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희생자의 흔적을, 듣는 것은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단식 농성장 뒤에 앉아 좀 쉬었습니다. 그곳에는 분수가 나오고 있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온 몸을 젖어가며 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슬픈 유가족 옆에 아이들을 풀어놓고 놀리냐며 타박하겠지만 전 무슨 상관이냐 싶습니다. 슬픔을 강요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뛰어노는 그 광장의 한 구석, 그늘막 아래 유가족들이 있고, 그 앞엔 경찰들이 있고, 자신들을 어버이라고 자칭하는 괴상한 이들이 여기를 뒤엎으러 오겠다고 한다니… 이 기묘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기사를 보니 아니나다를까, 일부는 직접 그 앞에가서 서명하는 책상을 뒤엎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길 건너편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것도 아닌데 설치지 말라며 시위를 했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만큼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찌해야 할까요. 부끄럼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며 그저 물어뜯기에 바쁜 이들을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크로산의 <예수>를 읽었습니다. 내일 세미나를 준비한다고 그런 거지요.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한 예수에 이르러 오늘 광장의 그들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의 질문처럼 이땅에 예수가 오면 누구에게갈까.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성전에서 휘둘렀던 채찍은 누구를 향할까.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울러 그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 너희 가운데 있다던 그게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전 십자가를 지고 걷는 세월호 유족의 사진을 보고 ‘주여 이들과 함께 하소서’라는 글을 달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생각하건대, 주께서 오실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바로 이들과 함께 ‘있음’을 이야기해야 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슬픔 속에 있음을 봐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 이땅의 불의에 의해 내몰려, 죽음과도 같은 삶에 내던져진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미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루가 6장)

그러나 한편 물신에 찌들어 자신들의 입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저주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비록 저들은 이땅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즐기겠지만 결코 그들에게 참된 안식이 없기를, 언젠가 저들의 혓바닥에서 뱉은 말들에 값을 치르기를 기도하려합니다.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짓밟은 자에게 저주를!’ (신명기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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