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과 집요함이 빚어내는 쾌락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

  • 연구실 세미나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었다. 발제문을 썼는데 일부를 옮겨둔다. 이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용문의 페이지는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평소에 읽는 책 때문이겠지만 문학과 거리가 멀다. 특히 이런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해치는 글은 더욱 그렇다. 수기手記라는 형태의 이 글은 마치 주인공의 내면을 훑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그의 속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고독한 사내는 분명 비뚤어진 상태 자체를 그저 내보일 뿐이다. 옛날 학교에서 배운 것이던가? 소설이란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그러나 여기에선 긍정적인 카타르시스를 만날 수 없었다. 씁쓸함. 불편함. 그리고 마음 한 켠에 남은 냉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은 것은 매우 오랜만이다. 처음 만난 것은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아마도 대학 졸업 학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수업을 들으려면 이 소설을 읽고 레포트를 제출해야 했다. 이틀인가 사흘을 꼬박 바쳤다. 소설을 읽는 나보다 소설 속의 시간이 더디게 가는 낯선 체험을 했다. 아무리 읽어도 사건은 전개가 안 되고, 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읽어놓곤 대체 이 소설이 뭐가 대단한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도리어 그 소설을 읽어낸 내가 대단했다.

두 번째 만남은 탈학교 친구들을 위한 학교를 준비하면서였다. 문학 수업이 있었는데 교재 가운데 «죄와 벌»이 있었다. 마음 먹고 읽었지만 이번엔 절반 밖에 읽지 못했다. 도끼를 들고 집을 나선 주인공을 좇아가다 그만 뒤떨어지고 말았다. 집요함을 좇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시간 읽은 «가난한 사람들»도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 주인공 마까르의 소심함을 지켜보며 그가 겪는 불우함을 따라가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지하 생활자’는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리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인간이 겪는 특정한 고통, 자신이 고통의 본질적 원인이 되는 그런 고통을 까발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확신한다 — 인간은 진짜 고통을, 다시 말해서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고, 고통 — 이것이야말로 자의식의 유일한 원인인 것이다. 나는 이 수기의 첫 머리에서 자의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그 불행을 사랑하여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의식이란 2×2는 4 따위보다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1부 지하세계’에서는 ‘2×2는 4’로 대표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상에 반대한다. 만약 인간이라는 것이 그토록 합리적이라면 인간의 감정을 특정한 표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도리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 생활자의 입을 빌려 그런 사고야 말로 인간 자체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인간이란 이익을 추구하되 그것이 자신을 참혹하게 망쳐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연의 법칙, 자연과학의 결론, 또는 수학’과는 다른 존재다.

그러나 2×2는 4란 것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2×2는 4 — 이런 건 인간에 대한 멸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양손을 허리에 대고 거만하게 앞을 가로막고 서서 침을 탁 뱉는 게, 바로 2×2는 4란 말이다. 2×2는 4가 훌륭한 것이라는 점엔 나도 이의가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에 다 그 권리를 인정하려면 2×2는 5도 역시 훌륭하다고 해야 할 게 아닌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 이익에 반대되는 짓을 일부러 할 리는 만무하므로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식의 논리일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순진무구한 젖먹이의 꿈이랄 밖에! … 그보다 만약에 인간의 이익이란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보다는 불리한 것을 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따라서 그가 주목하는 인간이란 다른 인간이다. 스스로를 우롱하는 존재, 추악한 짓을 하는 존재, 배은망덕한, 타성에 젖은, 게으른, 변덕쟁이, 일부러라도 미치광이가 되는 그런 존재. 인간이란 자유로운 의욕에 휩싸여 움직인다. 그런데 이때의 의욕이란 자기 파괴의 쾌락을 향해 있다. 인간이란 완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완성 자체, 목적을 성취하는 일을 두려워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완성에 이르는 것, 목적이야 말로 인간 자신을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놈은 경박하고 저속한 동물이어서, 마치 장기 두는 사람처럼 목적에 이르는 경로를 사랑할 뿐 목적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사실은 온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지상의 목적이란 것은, 모두가 이 목적 획득의 끊임없는 과정, 즉 생활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목적 자체 속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건 누구도 보증할 수 없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아내는 불편함이란 바로 이런데 있다. 그는 대체 안정 — 무사안일이란 모르는 인물이다. 그에게 인간이란 자신을 배반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것은 일종의 쾌락과 닿아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런 인간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지하로 내려가 밤 중에 끙끙대며 있더라도 누군가는 편안한 잠을 잘 뿐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괴팍한 심술이 나타난다. 안락한 잠을 방해하고픈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을 치통에 비유한다. 끙끙 앓으며 신음하는 소리.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의 소설은 이런 신음 소리하고 해도 좋다. 이런 짓궂음이야 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게 아닐까? 소설을 읽으며 무릎을 치도록 감탄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그처럼 요상한 취미를 가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야밤의 신음소리가 잠을 방해하는 귀찮은 소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한편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런 신음소리는 또 다른 어떤 쾌감을 자아내는 게 아닐까? 그것은 동정과는 다를 것이다. 오히려 그가 이야기한 그런 쾌감, 고약한 심술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언제든 19세기의 교양인이 치통에 시달리면서 신음하는 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그것도 아프기 시작한 지 이틀째나 사흘째 정도가 알맞다. 그때는 첫날과 신음소리가 상당히 달라진다. 즉 단순히 이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소박한 농사꾼이 내는 그런 신음소리가 아니라, 유럽 문화의 세례를 받은 개명된 인간의 신음소리, 다시 말해서 이른바 ‘조국의 땅과 국민적 본질에서 동떨어진’ 인간의 신음소리인 것이다. 그의 신음소리는 어딘가 더럽고 메스껍고 짓궂은 가락을 띠면서 밤낮없이 계속된다.
… 그러니 모두들 자지 말라. 내가 이를 앓고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끊임없이 느껴야 한다. 전에 나는 당신들한테 영웅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지금은 한낱 추악한 무뢰한으로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도 좋다! 당신들이 내 본성으르 간파해 주어 나는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당신들은 내 야비한 신음소리가 듣기 싫을 테지…… 흥,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라. 이제 더욱 듣기 싫은 가락을 붙여 들려줄테니……
… 당신들은 웃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도 유쾌하다.

  • 덧붙이면 언젠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맘 잡고 읽어봐야겠다. 예전에 읽었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이나 «죄와 벌»까지도. 인간의 심리를 해부하는 그의 손은 잔혹하나 내 마음을 끄는 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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