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

  • 학내에서 재학생의 대자보가 찢기는가 하면 총장 인선문제에 관한 대자보는 게시가 불허 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끈해서 다시 글을 올렸더랬다. 지난 10월 31일에 교내 인트라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모교 재학생이 불합리한 학칙을 문제 삼아 싸우고 있다. 요구 사항은 아래와 같다.

1. 학생들의 자유로운 비평적 글쓰기가 보장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1. 학생들의 자유로운 인쇄매체 발간을 보장하며, 학내의 그 어떠한 출판물도 작성자의 뜻에 반하여 사전에 검토, 검열당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1. 학교 당국에 인쇄매체 검토제 폐지 등 <학생간행물발간규정>의 전면 수정을 요구합니다.
1. 학생단체들에 <학생간행물발간규정>의 전면 수정을 추진하고, 보장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1. 차기 총학 후보자들에게 <학생간행물발간규정>의 전면 수정을 추진하고 보장하는 공약을 마련할 것을 요구합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다. 신임 총장 인선문제가 화두인데, 이를 논하는 대자보가 학생과에서 게시 불허를 통보받았다. 결국 대자보는 붙여지지 못했다. 학생처의 판단에 학생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근거가 되는 것은 ‘학생간행물발간규정’이라는 학칙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모교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른 학교, 이름만 대도 유명한 서울 유명 대학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학교의 입맛에 맞지 않는 대자보는 학칙에 근거, 가차 없이 떼어진다. 대자보를 통해 자유롭게 의사를 표하던 것은 옛 말이 되었다. 학내 미화를 위해,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떼어진다. 이러니 어느 신문에서는 ‘헌법 위의 학칙’이라는 말까지 만들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것은 ‘대학’이 하나의 ‘교육 기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대학은 더 이상 사회의 엘리트를 길러내는 곳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차이는 것이 대학생이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특권은 증발해버렸다. 남은 것은 청춘의 시간을 어떻게든 소모해야 하는 잉여들이다. 사회로 나가는 시간을 유예하는 일종의 도피처, 그것이 오늘날 대학의 한 모습이다.

이때의 ‘교육’이란 배움이 텅 비어 있다. 가르침을 받는 곳이지 배우는 곳이 아니다. 교육이란 하나의 관리 방식이며 통제의 기술이다. 따라서 교육 기관이라기보다는 ‘돌봄 기관’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모교가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팀 제도를 보자. 교수는 작은 목자가 되어 어린양 – 학생을 돌본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유사 가족이 탄생한다. 교수는 아버지가 되고 학생은 하나의 자녀가 된다. 더 나아가면 총장은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된다. 과거에도 은사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유사가족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학문의 유대가 빠져있다. 이렇게 대학은 감정의 공동체가 된다.

대학생은 더 이상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지도를 받아야 한다. 선한 목자일수록 이들을 버려두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을 두고 눈물을 보이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악어의 눈물이 아닌 진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을 돌보는 방법이지 제자를 키우는 방법은 아니다. 스승은 사라지고 교사만 남는다.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바보 만들기’이다. 이 바보들은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은 ‘나는 못하오’라는 순종의 언어로 입을 채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가장 적절한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내용’이 아니다. 말할 ‘의지’를 갖는다는 것,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권력은 알고 있다. 저 불온한 입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의지’는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붙여놓은 대자보를 재빠르게 제거하는 것은 교내 미화 때문이 아니다. 이 의지는 제거해야 하는 불온한 싹이다. 이 싹을 자르라! 학칙은 의지 위에 군림하는 왕이다. 교육이란 미명아래 학내는 초법적 공간으로 재배치된다. 서울시에서 제정한 청소년 인권조례가 학칙에 의해 휴짓조각이 된 일련의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학생이 마음대로 대자보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중고등학생이 학내에서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싸움은 쉽지 않다. 잉여들에게 말할 권리란 거추장스러운 것이므로. 말하라는 요구야말로 가장 부담스러운 공격이다. 슬그머니 ‘좋아요’를 누른다. 찬성과 반대 뒤로 숨는다. 이제 횡설수설하는 수다는 사라지고 민주적인 찬반의 의사표시만 남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마저도 수용될 장치가 없다는 거다. 온라인의 기호로 남을 뿐,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좋아요’는 이 냉소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소박한 위로에 불과하다.

말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 기도로 쌓은 저들의 견고한 성은 내가 어떻게 말하든 그렇게 있을 테다. 누군가는 그렇게 비아냥댄다. 그렇게 소리치는 건 자위가 아니냐고. 맞다. 불온한 소리를, 좌좀의 말을, 종북좌파의 선동질을 누가 듣겠는가. 싸움의 성패는 결정되었고, 나는 링에 올라서기에도 보잘것없는 존재다. 다만 아는 것은 말하는 것만이 우리의 무기라는 점이다. Unemployed, 빌빌거리는 자가 갖고 있는 것은 작은 입뿐 아니겠는가.

말해야 한다. 말할 뿐이다. 태초에 ‘말’이 있지 않았나. 말하지 못할 때까지, 아니 말하기 싫을 때까지 말할테다. 말하지 않으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므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수다보다는 침묵을, 분노보다는 사랑을, 용기보단 절제를 먼저 배우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무기! – Mar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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