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권위

  •  역시 모교 인트라넷에 쓴 글을 올려둔다. 일부 문장을 수정했다. 내용은 똑같다. 

교내 인트라넷은 조용하지만 총동문회 페이스북 페이지는 여전히 활발하다. 이젠 동문회 차원에서 총장 후보를 모으기 위한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누가 차기 총장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며칠 전 교수협의회에서 발표한 글에 탄력을 받았다. 문제는 어떻게든 차기 총장 후보군을 모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코앞으로 닥쳐온 후보 마감일을 두고 이런 움직임이 과연 실효성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게다가 이사회에서 제대로 못 하니 학생과 동문이라도 나서야겠다는 열의는 갸륵하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 대한 문제 제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의 의외다.

일련의 사태를 보고 확인하게 되는 것은 지난 20년간 반복되었던 지독한 아마추어리즘이다. 주먹구구식 운영. 한동대학교를 책임질 이사회는 마치 허수아비와 같아 보인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가? 10월 25일 모 일간지에 실린 총장 청빙 광고는 실소를 자아낸다. 인선위원회는 과연 차기 총장을 뽑을 의지가 있기나 한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점찍어 둔 사람이라도 있나. 아니면 동방박사처럼 10월 31밤, 새벽별을 따라 길을 나설 채비라도 한단 말인가. 총장 자리가 독이 든 성배라, 서로 미루는 바람에 제비뽑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원인은 간단하다. 지난 한동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총장의 독단적인 학교 운영이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막았다. 아마추어리즘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총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응원.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당신들의 말은 지독히도 많이 들었고, 여전히 쩌렁쩌렁 울려댄다. 얼마 전 총동문회에는 나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학교 당국에 대한 불신과 증오로 인해 모든 사안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조건적 반대와 비판을 한다’는 주장이 올라오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다. 신앙의 반대는 불신이며, 사랑의 반대는 증오이기 때문에. 문제는 그것이 개인의 신앙 고백, 사랑의 실천을 넘어 공유하기 힘든 단절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가정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조직과 단체에서 때론 일원으로 때론 리더로 일하면서 제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제가 해온 모든 의사결정과 업무 스타일이 다른 누군가가 봤을 때는 독단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결정이 다 옳은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때론 조직이나 단체에 피해를 주거나 함께 일하는 모든 구성원이 동의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해온 모든 결정을 독단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맡은 자리에서 제게 주워진 책임과 권한으로 결정한 사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재학 당시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독단적 의사결정’이라는 주장이 과연 맞는가?>라는 제목처럼 김영길 총장의 지난 과거가 단지 독단적으로 보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익숙한 표현을 만난다. 바로 ‘책임과 권한’, 즉 김영길 총장은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다했기에 독단적이지 않다. 아니, 설사 그것이 독단적일지라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도 기계적인 관점이다. 즉 어떤 권력이던 그것이 기본적인 원칙을 어기면서 행사되지 않는 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절차상의 문제에만 국한해서 따져보자. 여기에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부모와 자녀의 비유는 양념거리로 적당하다.

‘때론 자녀가 봤을 때 부모님의 의사결정이 독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부모님이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그 가정의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자녀가 부모님의 결정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을 다르게 옮기면 이렇다. 모든 권력은 본질적으로 독단적이다. 독단적이지만 독단적일 수밖에 없기에 독단적이지 않다는 형용모순. 그러나 이런 주장이 낯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권력이 마치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처럼, 일종의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진 은총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위계 아래 권력은 그 자체로 위엄을 갖는다. 민주주의니 합리니 하는 말이 먹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말할 테다.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고로 모든 권력은 선하다.

권력과 권위를 혼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니, 이처럼 위로부터 주어진 권력은 권위의 외피를 두르기 마련이다. 김영길 총장이 교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면서도 ‘총장님 우리 총장님’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권위를 옷 입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김영길에 대한 논의가 아닌, 총장에 대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늘 인신공격으로 오해되곤 한다. 부당한 권력 행사에 대해 논의하더라도 그것은 곧 불손한 일이다. 권위에 흠집 내는 것이므로.

따라서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지난 20년간 총장의 독단적 권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는가? 권력에 대한 비판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권위를 앞세워 소란을 진화하는가? 그의 권위가 그토록 신성하단 말인가? 한동대학교가 그런 권위 아래 복속하는 공동체였나? 권력에 대한 비호는 독재에 대한 찬양이 된다. 권위에 대한 비호는 우상에 대한 찬양이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대학’이라는 말처럼 거짓된 수사가 어디 있겠는가. 시나이산의 계명을 운운할 가치조차 없다.

누가 차기 총장이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행사되었던 방법이 바뀌지 않는다면 한동의 미래는 없다. 왕좌에 또 다른 누가 앉는다고 권력의 속성이 바뀌지 않는다. 김영길 총장을 누구로 대신하느냐라기보다는 우리가 권력에 대해 어떤 정치의식을 갖고 있으며,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야 한다. 권력에 권위를 덧씌우는 행태도 재고해봐야 한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루가 20:24)

내가 아는 예수는 권력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배제당한 자들의 친구였으며 그가 연 식탁엔 누구나 초대받을 수 있었다. 아니, 그는 권력 자체를 거부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존재 자체가 불온했다. 율법을 따지는 유대 사회에서도, 수직적 계급 사회였던 로마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러니 십자가의 참혹한 처형을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그를 주主라 부르고, 이것이 신앙 고백이라면, 그것은 그가 왕관을 탐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예수는 먹보에 술꾼, 죄인의 친구였다.

불행하게도 예수를 배반하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다. 지난 26일 서울 나들목 교회에서는 ‘제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가 열렸다.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이 이것이다. ‘한국은 좀 독재를 해야합니다!’ 사람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이유인즉 하느님이 독재했기 때문이란다. 갑자기 30년 전에 죽은 자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00년 뒤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 권력에 덧입힌 성의는 이처럼 추악하다.

박정희에 대한 신앙 고백을 평가하고 싶진 않다. 다만 ‘신앙전력화'(http://goo.gl/bJKf4l)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단순히 고백을 넘어 정치 구호이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다. 종교의 탈을 쓴 또 다른 정치 협잡꾼의 등장을 반겨서야 하겠는가. 그래도 평소 같았으면 손가락질하며 웃어넘겼을 일이다. 그러나 이젠 웃어넘길 수 없다. 결코 먼 일이 아니기에. 가지고 있는 것이 고작 냉면 그릇을 요강 취급하는 저열함 뿐이라면, 과연 무엇이 다른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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