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님! 교수님! 예의 없는 님?!

 

  • 역시 인트라넷에 올린 글을 옮겨 둔다.

1. 시해弑害 or 살해殺害

曰 臣弑其君可乎
曰 …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제선왕이 말했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해도 됩니까?’
맹자가 말했다. ‘주紂라는 놈을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맹자>는 논쟁을 쉬지 않는다. 그의 까칠한 성격은 권력의 위협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화 속에 등장하는 주紂는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폭군이었다. 그는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에게 죽임을 당한다. 제선왕의 질문은 이렇다. 아무리 군주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맹자의 대답은 흥미롭다. 일부一夫, 한 사내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시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시해’와 ‘살해’는 다르다. 시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맹자는 주紂를 죽인 일이 살해였지 시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 주紂는 이미 폭군으로 군주라 불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강독하면서 한 학인이 물었다. ‘박정희 시해’라는 말이 틀린 것이네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선은 그에 대한 평가의 문제. 유신헌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장기 집권을 노린 박정희는 정당성을 잃었다. 따라서 그는 대통령으로 죽은 게 아니라, 독재자로 죽은 것이다. 그를 쏜 김재규는 그의 부하가 아니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계급 사회의 표현을 민주 사회에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박정희는 10.26 그날, 살해당한 것이지 시해당한 게 아니다.

갑자기 이 시국에 웬 <맹자> 이야기며, 역사 이야기를 끌어대는지 궁금할 것이다. ‘님’자를 두고 술렁이는 소란을 들으니 갑자기 <맹자>의 이 대목이 생각났다. 이처럼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에 대한 호칭을 결정짓는다. 말에는 특정한 판단이 들어가 있다.

맞다. 내가 ‘총장님’이라 하지 않고 ‘총장’이라 말하는 것은 거기에 존경을 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한테는 은사, 아버지와 같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불편함은 당연하다. 나에게 총장님이란 말이 불편한 것처럼. 그러나 그것을 두고 예의를 운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총장님이라는 특정한 호칭을 정해놓고 그 게임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바꿔 말해 나는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불편한 이유는 거기에 특정한 판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들의 반응은 옳다. 그러나 당신들의 비난은 틀렸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두고 반론을 펼치기보다는 그 의견 자체를 묵살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비난은 ‘난 판단하지 않겠소’와 같은 말이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너는 판단 하느냐?

차라리 의견을 말하라. 김영길 총장이 19년간 학교를 독단적으로 운영했다는 말이 불편하다면, 그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라. 김영길 총장의 장점을 말하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너의 말은 틀렸다.’ 그렇게 말하고 주장하라. 예의 없다며 손가락질하지 말고. 도덕적 비난 뒤에 숨지 말고 나오라. 비겁자가 되지 말고 당당하라.

 

2. 캥거루 자루 속에서

어린아이는 상대와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부모와 자신을 나누어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성장에는 단절이 필수다. 부모와 내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단절을 건강하게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영길 총장을 한동대학이라는 가정의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총장’님’이라 하지 않는 이들은 후레자식이다. 예의 없는 것, 근본 없는 것. 교수’님’도 마찬가지다. 한동대학에 교수는 없다. 교수님이 계실 뿐이다. 이렇게 말을 통해 권력은 내면화되고 증식한다. 권력은 말에서 온다. 당신들 스스로 어린아이가 되었다. 이 위계는 총장이라는, 교수라는 자리가 만든 게 아니다. 그만큼 권력의 비대칭은 견고하며 그 누구도 깨뜨리기 힘들다.

교수라 불리기를 거부한 이가 있었다. 교수는 직위를 의미할 뿐이라며.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선생이라 불렀고 나는 학생이 될 수 있었다. 아이는 부모에게 마음의 안식을 찾지만, 학생은 선생에게 배움을 얻는다. ‘교수(proessor)’란 자신의 앎을 고백하는 자를 의미한다. ‘교수님’을 사랑하는 당신들에게 묻는다. 그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아기 캥거루는 어미의 자루가 필요하다. 그가 아직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거듭 묻고 싶다. 그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당신들에게. 무엇이 당신들을 나약하게 했는가? 거대한 몸뚱이를 가지고 어째서 비좁은 그곳으로 숨으려 하는가? 그곳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꾼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욥 38:3) 자기 말이 없는 자가 어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욥의 세 친구를 기억하라. 그들이 야훼의 분노를 산 것은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의를 운운하는 당신들은 솔직하지 못하다. 자신의 말이 있으면서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 나는 그 거짓 가면이 싫다. 두 귀는 막고, 혀는 감추고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게으르기 위한 노력이다. 침묵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안온하게 쉬고 싶을 뿐이다. 게으른 나는 게으르게 있고 싶다. 이게 당신의 말이다. 배려를 말하는 당신은 자신의 입을 열기 귀찮기 때문에 거꾸로 상대방의 입을 막아버리려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침묵으로 덧칠했다. 침묵하라. 내가 게으른 만큼 너도 게으르라.

게으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색깔론이다. 대충 구분해놓으면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역사학자를 자처하는 유영익은 지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친북이라 말했다. 지독히도 간단한 도식이다. 게으름을 사랑한다면 나에게도 입맛대로 편안하게 꼬리표를 붙여라. 친북이건 좌빨이건 좀비건 키워건. 차라리 그런 면에서 한동갤러가 낫다. 사유의 게으름은 동일하나, 적어도 그들은 침묵으로 가장하진 않는다.

 

3. 자유는 자유 속에 있다.

학내 인트라넷을 보니 학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대자보 하나도 자유롭게 붙이지 못하는 곳에 무슨 말을 더하랴. 학생처장의 판단 아래 대자보를 붙일 수 있다는 이 코미디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가두리 양식장도 이런 곳이 없을 터. 학생들은 사랑과 겸손을 외치며 결국엔 쿠크다스 멘탈, 교수는 학생을 지도하기 바쁘다. 학생처장과 학생주임의 차이가 대체 뭘까.

자본에 침식당한 대학은 더 이상 지성도 양심도 기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하물며 영성을 말해 무엇하랴. 그나마 희망을 찾자면 우정과 용기가 아니겠는가.

오늘 함석헌의 글을 읽었는데,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그는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 마디 덧붙이면 용기는 용기있는 행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럼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는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 우리 문제 있는데가 여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언론 자유를 얻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얻어집니다. 언론 자유 있어야 된다는 소리 해가지고는 소용이 없읍니다. 그 소리는 공화당 정권의 종 노릇하는 오늘의 신문 잡지도 다 합니다. 자유라는 이름을 불러서 자유는 오는 것 아니라 실지로 죄악적인 법을 무시하고 할 말은 함으로만 됩니다.’
–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씨알 1호>, 197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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