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신앙, 침묵의 미덕

0.
나에게 모교, 한동대학교는 정치적 공간이다. 왜냐고? 어떤 정치 문제가 터지는 순간 낯선 학번과 아이디를 기억하며 학내 인트라넷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FTA에 들어왔었고, 김미영 교수가 저지른 몇 사건 때문에 다시 찾았고, 이후엔 윤상헌 교수 징계 건으로 찾았다. 졸업한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다행히 접속할 순 있다. i2가 i7이 되었고, 횡수가 HD광장이 되었지만.

1.
시국선언을 두고 학내 소란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시국선언 여부에는 별 관심 없다. 보수적 신앙으로 똘똘 뭉친 한동대학이 정치적 순간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으니. 시국선언을 했다면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총동문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뻔하다. 말 못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운운할 것도 없고, 거기에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낡은 구호를 들먹일 것도 없다. 지금까지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럴 거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당신들의 나라, 당신들의 정당, 당신들의 대통령을 위해서라는 건 굳이 입 아프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한심한 종자들과 키배를 떠봤자 뭐하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보수적 입장과 다른 어떤 일관된 태도가 내 발목을 잡았다. 침묵과 말, 신앙과 비신앙의 대립. ‘침묵의 믿음’을 말하는 이들에게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그래,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믿음’이야, 바보야!

2.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비판의 목소리 대신 기도의 손을 모아야 할 시간이라고. 한편 아직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일이니 선동 당하지 말라며 침묵의 미덕을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은 소리 없이 행하는 분이다. 하느님의 공의는 정의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욥의 고난이 보여주듯, 불의란 어느 날 예측하지도 못한 순간 우리에게 닥친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19:6)

나를 쳐다보게나. 기가 막혀 열린 입이 닫히지 않을 것일세. … 악한 자들이 오래 살며 늙을 수록 점점 더 건강하니 어찌 된 일인가? … 그들의 집은 태평무사하여 두려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없지 않는가? (21:5~9)

악인들의 돌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포도 짜는 술틀을 밟으면서 목은 타오르고 죽어가는 소리와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하시네(24:11~12)

*번역은 모두 ‘개정판 공동번역 성서(대한성서공회, 2001)’

<욥기>는 아무런 사건 없이 욥과 세 친구의 말로 가득 차 있다. 이중 단연 튀는 것은 욥의 말이다. 잿더미에 앉아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그가 외치는 소리는 처절하다. 그는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대체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직면한 명백한 불의를 설명하려면 하느님에게 따져 물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불온한 욥을 세 친구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감히 하느님을 욕되게 하다니!

어찌하여 이렇게 진정하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이렇게 눈을 치뜨고 극성인가? 어찌하여 하느님과 맞서 화를 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렇게 지껄여대는가?(15:13-14)

그러나 놀랍게도 폭풍 속에 등장한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을 꾸짖는다. 솔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42:7)

3.
성서를 읽는 그 누구도, 욥의 세 친구를 의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불평의 입을 가진 욥을 기억할 뿐, 하느님의 정의를 운운한 세 친구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욥이 신앙의 출발점에 섰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불의에 직면한 순간, 욥에게는 하느님의 등장이 절실하다. 야훼의 힘이, 그의 변호가 그에겐 절실하다. 그러나 세 친구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욥의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욥의 친구들이 열을 올리며 말하는 건 욥의 불평에 대해서지 맞딱드린 불의에 대한 게 아니다. 이들이야말로 침묵의 믿음, 그 반석 위에 선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건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말하지 마라. 대신 봐야 하며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하느님은 나타나지 않는다.

얼굴 없는 하느님. 최초의 선지자이자 구원자의 모델이었던 모세에게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이 욥에게 나타난다. 폭풍 속의 말을 통해.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42:5)라는 욥의 말은 야훼의 현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과연 욥 만큼 하느님을 독대한 사람이 있었던가. 욥이 하느님을 뵈었던 것은 그의 ‘말’에 있었다. 그의 불평은 거꾸로 하느님의 현현을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불의란, 문제란 신앙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침묵하는 자에게 하느님도 침묵한다. ‘침묵의 신앙’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신의 필요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사실상 정치적 문제에서 중립이란 없다. 서로 다른 가치의 ‘합의’만 있을 뿐.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 아니면 이것이다. 사랑과 화합을 말한다고, 문제를 다 헝클어 버리고 대충 뭉개버릴 수는 없지 않나.(물론 개중엔 이쪽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 적지 않다.) 침묵이야말로 또 다른 정치적 행위라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많은 경우 보수적인, 기득권의 편이었다는 것도.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침묵하는 자들을 위한 구원’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할 것이다. 당신들의 신앙에는 ‘예, 믿으오’와 ‘아니오, 믿지 않소’ 밖에 없지 않나. 야훼가, 마치 정의의 여신과 같다고 하는 건가? 두 눈을 가린 채 정의의 저울을 손에 든.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두 눈을 가린 그 대신 그의 손에 쥔 저울을 ‘신’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참과 거짓이 거기에 있으므로.

4.
침묵은 미덕이다. 오래된 금언이다. 경솔함보단 침묵이 낫다. 당연히. 어떤 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만한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덕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덧칠하려는 이들이 있다. ‘침묵의 신앙’을 외치는 사람들. 그들은 도리어 침묵의 미덕을 실현해야 할 순간, 너의 입을 다물라며 큰소리친다. 그것이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며, 하느님의 잣대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냐며. 침묵의 미덕은 침묵으로만 빛을 발할 뿐이다.

침묵의 미덕을 왜 ‘침묵의 신앙’으로 오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말을 잃어버린 예배, 말할 필요가 없는 신앙(이라 쓰고 불신이라 읽는다) 때문이다. 다수의 개신교 예배는 침묵의 예배다. 들을 귀만 있으면 된다. 일방향 통행. 목사(牧師) 없는 교회, 단지 십자가 네온만 번쩍이는 교회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사목(司牧), 목자로서의 직분은 사라지고 설교자만 남았기 때문이다. 목사는 목회를 하지 않는다. 설교를 할 뿐. 예배는 사라지고, 설교만 남았다. 성찬에 참여하는 기쁨도, 성도의 한 몸 된 교회도 없고, 교훈투성이의 말만 남았다. 그러나 이 말은 다수의 침묵을 대가로 한다.

목사’님’에게 교수’님’에게 총장’님’에게 말을 넘기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일까? 신앙이 고백과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의 고백이 ‘님들을 위한 찬양’에 불과한 이상 그때의 구원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허상 아닐까.

침묵은 미덕이다. 그러나 그 미덕을 신앙인양 호도하지 말길. 회칠한 무덤 같은 자야!

+.
물론 여기에는 사유의 빈곤, 상상력의 부재가 원인일 수도 있다. 사유와 스펙을 맞바꿔 버린 이상 무슨 토론이 가능하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생의 본분을 운운하지만 결국 바라는 건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 남 부끄럽지 않은 사회적 명성 아닌가. 10년 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이 ‘하느님의 대학’은 이렇게 가이사의 자식을 길러왔으니 어쩔 수 없다. 갈대 상자에 실려온 가이사의 동전이 있는 한 탈출(Exodus) 자체기 필요치 않으니.

굶주림과 갈증은 무엇인가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쓴 물이건, 메추라기건, 하늘의 선물이건 간에. 오랜만에 들어가 본 모교 인트라넷은 의외로 조용하다. ‘횡설수설’이 없다. 소통도 없고, 논쟁도 없고, 고민도 없어 보인다. ‘좋아요’와 ‘싫어요’로만 환원되는 익명의 누군가가 있다.

아마 얼마 뒤에 복음서는 다시 쓰여야 할 것 같다.

죄수: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이 좋아 합니다.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님이 좋아 합니다.

오랜만에 학교 인트라넷에 올린 글. 오타가 많고, 맞춤법 틀린 데가 많아서 좀 고쳤다. 조금 표현을 다듬은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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