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정, 틈을 노려라!

1. 양생養生, 삶을 가꾸는 법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殆已 已而為知者 殆而已矣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의 시작이다. 풀이하면 이렇다. “우리 삶에는 끝이 있다. 그러나 앎[知]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을 가지고 끝이 없는 것을 좇는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럴 뿐인데도 알려고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일 뿐이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문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지만 앎[知]이란 끝이 없다. 유한한 삶[生]으로 앎[知]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장자»라니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무지무욕無知無慾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인위적인 앎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던가, 아니면 욕망을 끊고 소박한 삶을 살라고 하는 따위의.

결론부터 말하면 장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장자는 이 유한한 삶의 한계 위에서 어떤 앎, 또 다른 지혜를 추구해야 함을 끝없이 주장한다. 필멸必滅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이 세계를 살아야 하는 운명.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양생養生’이라는 제목이 이를 대변해준다. 삶을 기르는 법, 다르게 말하면 삶을 가꾸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도입부다.

為善无近名 為惡无近刑 緣督以為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선을 행하더라도 명성을 얻기까지 하지 마라.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을 받을 정도에 이르지는 마라. 중中을 법칙으로 삼아라. 그러면 자신을 보전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이룰 수 있고, 부모를 제대로 섬길 수 있으며, 수명을 다 할 수 있다.”

‘為善无近名 為惡无近刑: 선을 행하더라도 명성을 얻기까지 하지 마라.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을 받을 정도에 이르지는 마라.’ 선을 행하지도 말고 악을 행하지도 말라는 말은 아니다. 명성을 얻을 정도로, 형벌을 받을 정도까지는 하지 마란다. 그렇다면 적당히 하라는 말인가? 아니, 그런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연독緣督’이라는 표현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중中을 지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포정庖丁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이 중中이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시중時中과 같은 것이 아님을 언급해둔다. 어떤 윤리를 세우기 위해 장자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자신을 보전하고[保身] 삶을 온전히 하는[全生] 방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하늘이 준 수명을 다 하기[盡年] 위함이다.

 

2. 기술이 아닌 도道의 경지!

위에 인용한 서문 격인 글이 끝나면 흥미로운 우화가 한편 등장한다. «장자»에 나온 여러 우화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우화다. 바로 포정해우庖丁解牛, 포정이 귀신 같은 기술로 소를 잡았다는 그 고사의 출처다.

庖丁為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譆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을 쓰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칼을 밟고 무릎으로 칼을 누르며 칼을 놀렸다. ‘휘익’, ‘쓰윽’하는 소리가 음악에 딱 들어맞았다. ‘상림桑林’의 춤에도 ‘경수經首’의 가락에도 들어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까!’ 포정이 손에서 칼을 풀어 놓고 대답했다.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이것은 기술보다 나은 것입죠.'”

‘포정庖丁’이라는 이름은 사실 별 의미 없이 지은 것이다. ‘포庖’는 푸줏간을, ‘정丁’은 사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옮기면 백정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그저 ‘백정’으로 옮기는 번역본도 있다. 전통 사회에서 백정은 천민이었다. 그런데 이 포정은 어찌나 실력이 뛰어났던지 문혜군, 군주 앞에서 소를 잡을 정도였다.

중간에 나오는 ‘상림’이나 ‘경수’는 왕실에서 쓰였던 춤과 곡조를 가리킨다. 그냥 뜬금없이 소를 잡은 게 아니라 한쪽에서 음악이 울리며 춤추는 와중에 소를 잡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왕실 파티에서 소를 잡았단 말씀. 그런데 포정의 절묘한 기술은 음악은 물론 춤과도 딱 들어맞을 정도로 어울렸단다.

문혜군의 눈에 띈 포정은 군주와 대면할 기회를 얻는다. 문혜군이 누군지는 불분명하나 군君이라는 칭호를 보건데 아마도 제후국의 군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낱 백정을 만나다니! 고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포정이 문혜군에게 어떤 지혜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바로 도道에 관한 이야기다.

문혜군은 기술[技]로 이야기를 꺼냈으나 포정은 기술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도道이다. 한마디로 도통道通했기에 훌륭한 기술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어서 도의 경지에 오른 포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3. 마치 숫돌에 막 간 듯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无厚 以无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훌륭한 백정은 매년 칼을 바꿉니다. 살을 자르기 때문이지요. 반면 평범한 백정은 매달 칼을 바꿉니다. 뼈를 가르기 때문이지요. 지금 저의 칼은 십구년이나 되었습니다. 잡은 소만도 수 천 마리입니다. 그러나 칼날은 아직도 숫돌에 막 간 듯 합니다. 저 소에는 틈이 있는데 칼날은 두께가 없습니다. 칼날을 놀리는 데 널찍하여 여유가 있습니다. 이러니 십구년이 되었지만 칼날이 숫돌에 막 간 듯 날카롭습니다.”

포정의 그저 소를 잘 잡는 백정에 그치지 않는다. 각 부위를 손상 없이 해체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그가 쓰는 칼도 상하지 않는다. 방법은 간단하다. 틈이 있는 곳에 칼날이 들어가면 된 단다. 그렇게 하면 살을 자르지 않고도, 뼈를 가르지 않고도 칼을 놀릴 수 있다.

그렇게 19년 동안 칼을 썼지만 아직까지도 칼날이 상하지 않은 채로 번쩍인단다. 포정의 칼날이 그렇게 날카로울 수 있는 것은 뼈와 살, 힘줄과 근육 사이에 절묘하게 알아챘기 때문이다. 천리[天理]를 따라 칼날을 놀린 것이라고 포정은 말한다. 후대 성리학자들은 ‘천리’를 천지자연의 법칙으로 이해했지만 지금 포정이 말하는 천리란 ‘법칙’보다는 ‘결’의 의미에 가깝다.

모든 사물에는 타고난 결[天理]이 있다. 이 결을 따라 움직이면 된다. 포정이 소를 잡았다니, 고기를 생각해보자. 모든 고기는 결이 있다. 이 결을 따라 고기를 잘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기는 엉망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결을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어떻게 이 결을 알 수 있는 걸까? 포정의 말을 빌리면 눈과 귀를 닫아야 한다. 포정은 일반적인 감각기관[耳目]으로는 결코 이 맥락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다른 감각 기관이 필요하다. 이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신神’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정신精神’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어 어떤 사태나 문제를 대했을 때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감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官知止而神欲行’ 눈으로 보려하지 않자 ‘신’이 움직인다. 여기에 몸을 맡기는 것. 바로 포정은 그 경지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도道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포정을 말을 다 들은 무혜군은 이렇게 말했다.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좋구나! 내 포정의 말을 듣고는 양생을 깨우쳤다.” 결을 따라, 즉 틈을 따라 칼날을 놀린 포정에게 삶을 가꾸는 비결을 배웠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 포정의 말에 자신을 보전하고[保身] 삶을 온전히 하는[全生] 방법이 숨어 있는 것이다.

 

4. 탑Top을 노려라? No, 틈을 노려라!

«장자»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가진 통상적인 사유를 전복해버린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우화라는 장치를 이용한다. 가공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장자»에는 우화의 주인공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위에 소개한 포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생각해보라. 막 소를 잡아 온 몸이 피투성이인 거친 사내가 들려주는 도道에 관한 이야기. 그런가 하면 «장자»의 다른 부분에서는 미치광이도 나온다. 무슨 죄목인지는 모르나 형벌을 받아 신체의 일부가 훼손된 사람도 대거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천하를 놀래킬 만한 추남, 날 때부터 신체가 불구인 사람들까지.

한편 이들에게 놀림받는 인물은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들이다. 문혜군과 같은 상상의 군주가 있는가 하면 실제 있었던 군주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위령공이나 제환공과 같은 인물들은 당시 이름을 들으면 다 아는, 천하에 이름을 떨친 군주들이었다. 한편 공자와 같은 지식인은 물론 정나라의 자산[鄭子産]과 같은 이름난 재상까지 등장한다. 그런데 «장자»에서 이들은 가르침을 주기는 커녕, 가르침을 받고 특정한 깨달음을 얻는 이로 등장한다.

«장자»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모를 보면 장자가 어디에 시선을 두었는지 알 수 있다. 장자의 눈은 결코 위를 향하고 있지 않다. 도리어 그의 시선을 철저하게 아래를 향하고 있다. 장자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 장자를 모시고자 한 군주가 있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런 부귀영화를 간단하게 무시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진흙 속에 뒹굴며’ 살겠다고 말한다. 장자 자신이 바로 그런 하류의 인생이었다.

‹양생주›의 시작에서 보았 듯 장자의 문제는 유한한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자신을 해치지 않고 삶을 온전하게 이끌어가는 지혜에 관해 묻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사회적인 명성과 지위를 얻어야만 제대로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 세상의 틈을 노려 그 속에 노닐어야 한다[遊]고 말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19년이나 썼지만 새로 간 칼날 마냥 온전한 모습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진흙탕 속에 살아가겠다고 말한 장자는 진흙탕, 즉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삶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장자는 거기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배제되고 소외된 삶의 현장, 바로 여기가 틈을 발견해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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