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 부는 치맛바람

1. 문제의 시작

아이-대학 … 응??

지난 토요일(11일) 경향신문 사설에는 ‘교수가 강의 중 정치적 발언으로 징계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내용인 즉, 수업 시간에 정치적 발언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는 이유로 해당 교수가 징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발언이란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천안함 사건, 광우병과 같은 문제를 들어 현 정부를 비판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학교측에서는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를 징계 사유로 들고 있다. 거기에는 현직 총장을 비판했다는 괘씸죄도 함께 들어 있다. 교수로서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명목으로.

불행히도 이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대학은 나의 모교이다. ‘하나님의 대학’을 모토로 삼는 포항 한동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설명을 덧붙이면 개교 이래로 실용적 기독교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았던 까닭에 입학생 가운데 다수가 기독교인이다. 그럭저럭 취업도 잘되어 일부에서는 ‘신흥 명문대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언론에 이 사건에 보도되자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보수적 기독교 신앙이 문제라는 이야기에서 대학으로서의 비판 정신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까지.

그러나 정말로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던 것은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 시작은 이렇다. 수업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떤 학생이 수업 내용을 임의로 녹취했고, 이 녹취를 들은 학생의 학부모가 그 수업의 교수는 물론 총장에게 일종의 항의 서신을 전달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전국학부모회’에서 학교측에 공문을 발송하여 정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내용만 보자면 현정부와, 총장 비판이 징계 이유지만 과정을 보면 학부모의 항의가 이 사건의 핵심이다.

따라서 징계 절차는 교수 개인의 정치적 발언을 입 막으려는 것보다는 학부모의 항의에 대한 학교측의 성의 있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교수의 다른 수업에서도 정치적 발언은 많이 있었다. 해당 수업을 맡은 교수가 대단히 좌편향적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측에서 끈질기게 강요했던 것은 정치적 신념을 버리라는 일종의 ‘전향서’따위가 아니라 수업에 불편함을 느낀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사과였다. 결국 이 사건을 단순화하면 이렇다. 학교의 교육 서비스에 학부모는 불만을 느꼈고, 학교는 이를 달래주려 할 뿐이고, 교수는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될 뿐이고.

 

2. 학부모, 교육 서비스의 진정한 구매자

대략적인 상황을 아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정치적 문제로 다뤄지는 것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끼어들기에는 이 사건이 가진 깊이가 지나치도록 얕기 때문이다. 수업에서 말한 내용은 정치적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만큼 일상적인, 아내의 말을 빌리면 ‘요즘 개나 소나 다 하는’ 정도의 발언이다. 좌우는 물론 진보냐 보수냐를 논할 수도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사안이다.

물론 현정부에 대한 가벼운 농담과 현직 총장에 대한 비판적 언사가 이 문제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경직된-편협한 사유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이다. 노란 딱지를 보고도 빨간색이라며 경기를 일으키는 편협한 시각 탓이란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학교측은 빨갱이를 색출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 편협한 시각으로 제대로 빨갱이를 골라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학교측의 주장은 간결하다. 그들은 본래 정치에 관심 없다. 아니 무지하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오로지 그들이 외치는 것은 ‘교육’이라는 지상 명제다.

교무처장의 발언은 학교가 얼마나 이 ‘교육적’ 기능에 충실하고자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학교에 교육시켜달라고 맡긴 것이며, 그 때문에 등록금을 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받는 교육에 관해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교육자’로서, 더 엄밀히 말하면 ‘교육 서비스의 제공자’로서 성실함이 진하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는 잘 알고 있다. 왜 학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그것은 ‘등록금’을 내는 학부모야말로 이 교육 서비스의 진정한 ‘구매자’이기 때문이다. 구매자의 불만에 즉각 반응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아니, 서비스 제공자가 갖춰야 할 필수적 덕목이 아니던가.

항의 서신을 보낸 학부모 역시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짚어내고 있다. 인트라넷에 공개된 항의 서신에서 학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학부모들은 등록금내고 이이들이 당연히 학과목 공부를 하는 줄 압니다.’ 정부와 총장을 비판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신성한 수업시간에 이루어졌다는 거다. 수업에서 학과목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수업이 침해당한 것이다. 그것도 쓸모없는 이야기로. 그래서 징계를 둘러싼 공방은 과연 수업 시간의 몇 %를 학과목 이외의 이야기로 썼는가 하는 웃지 못할 촌극으로 빠지고 말았다.

교무처장과 학부모, 이 둘을 이어주는 하나의 견고한 끈은 바로 ‘등록금’이다. 학부모가 학교에 간섭할 수 있는 이유도, 학교가 학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등록금’ 때문이다. 이 등록금은 지식의 판매자로서의 대학과 이를 구매하는 소비자로서의 학부모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이 화폐를 통해 학부모가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자녀의 교육’이며 대학은 이에 가능한 성실하게 봉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도 학부모가?’라는 질문은 이미 낡은 질문이 되어 버렸다. 이미 기업이 된 대학은 구매자-학부모 모시기에 열심이다.

국민대학교는 이미 ‘학부모 서비스센터’라는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학부모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에 대해 언제든 학부모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아주대에서는 ‘신입생 학부모 대학 방문의 날’을 만들어 학부모를 학교에 초대하고 있다. 아주 대학교가 제공한 보도 자료의 첫머리에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자리 잡고 있다. “귀댁의 자녀들을 대학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숙명여대에서는 학부모와 함께하는 진로 탐색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제 학부모는 취업까지 마음 놓고 대학에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대학의 학부모 초청행사. 출처는 «고대뉴스». 기사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자리에서 총장은 축사를 통해 사랑하는 자녀를 본교 보건과학대학에 보내 준 학부모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학생들을 국제경쟁력을 갖춘 명품 인재로 길러낼 것을 약속했다.”

3. ‘대’학생은 없다

대학은 더 이상 입시생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대학이 학부모에게 먼저 접근한다. ‘귀댁의 자녀를 우리 학교로.’ 진정한 ‘고객’은 대학생이 아니라 그들의 학부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대학생은 위탁받아 교육해야 할 ‘아이’로 지칭된다. 위에 언급한 한동대 교무처장과 학부모의 글을 보라. 그 결과 더 이상 ‘대학생’은 없다. ‘대大’학생은 없다. 대학생도 학생이라는 이 낯설고도 평범한 이야기는 이렇게 힘을 얻는다.

실제로 한동대 김영길 총장은 줄곧 대학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했다. 이때 교육이란 참된 인성 함양과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무 인재 양성이라는 현실적 가치를 얼마나 잘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이 맞춰있을 뿐이다. 교수는 학자가 아닌 교육자, 엄밀히 말하면 교육 서비스의 제공자로서 호출된다. 한동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의 가운데 교수의 학문적 양심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교수는 초중고보다는 더 유용하고 쓸모있는 지식을 파는 지식 판매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생 가운데 절대다수는 이 지식을 구매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부모의 호주머니를 빌리지 않고는 막대한 대학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학에서 대학생은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은 존재. 그들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주체로 대접받지 못한다. 도리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지도받아야 할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피교육적 대상. 아이.

 

헬리콥터 맘, 혹은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s). 자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시시콜콜 간섭하는 부모를 일컫는 말.

14일 김영길 총장은 여전히 해당 교수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어 발생한’ 중대한 문제로 규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누구’의 권리가 침해되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 누구를 알지 못하므로 사과할 수도 없다. 이 사건에서 ‘학생’이란 주체는 어느새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학생은 사라지고 지식을 파는 대학-교육상점과 이를 구매하는 학부모만 남았을 뿐이다. 과연 ‘학습권’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자본이 권리가 되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생의 권리란 또 다른 환영에 불과하다.

이 웃지 못할 촌극이 한동대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 다른 대학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믿거나 말거나. 또한 비단 ‘대학’의 문제만도 아니다. ‘교육’을 파는 시장-대학에서 더 분명하게 문제가 드러났을 뿐이다. 이미 일부 학자들은 20대와 30대를 ‘연장된 청소년기’라고 부르고 있다.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청년 백수의 이야기는 흔하디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대학 입학에서 학점 관리는 물론 취업까지 챙겨주는 ‘헬리콥터 맘’ 역시 그냥 웃어 넘길 만큼 기이한 일도 아니다. ‘어른 아이’가 판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학부모들은 촌지를 통해 치맛바람을 일으켰다. 은근슬쩍 건네는 봉투를 통해 학부모는 학교에 발언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의 학부모에게 촌지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등록금으로 구입한 정당한 소비자의 권리가 있으니. 권리 없는 자, 대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똑같이 자본으로 권리를 사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자본으로 통용할 수 없는, 화폐화 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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